한국 민주주의의 초석 장면 총리
○… 6월4일은 고 장면(요한) 총리의
○… 서거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장 박사
○… 의 삶을 본받고 기리기 위해 창설
○… 된 운석회는 이날 오전 10시에 서
○… 울 혜화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 주례로 서거 30주년 추모미사를 봉
○… 헌한다. 이날 미사 후에는 고인을 위
○… 한 추모음악 연주와 이회창 전 총리
○… 의 부친 이홍구 옹과 고려대학교 조
○… 광 교수의 추도사가 있을 예정이다.
가톨릭 신문은 고 장면 총리 서 …○
거 30주년을 맞아 이 땅에 하루빨 …○
리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도록 기원 …○
하면서 신앙인으로서 또 정치인으 …○
로서 파란 많은 생을 살았던 고인의 …○
생전을 회고해 본다. …○
다음은 당시 장면 총리를 수행하 …○
며 취재를 담당했던 현 경향신문 …○
파리 특파원 정종식(프란치스코) …○
고문이 보내온 특별 회고문이다. …○
5ㆍ16후 장면 박사를 혜화동 자택으로 찾아 뵈옵기는 그날이 꼭 두 번째였다. 그러나 그 날은 장 박사가 선종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갔을 때였다. 박사님은 대청마루 중앙에 반듯이 누워 계셨다. 미처 수의도 입히시지 않은 채 평상복 차림이었지만 누워 계신 그 자태에는 어디 하나 흐트러진 데가 없었다. 입은 굳게 다물고 있었다. 굳게 다문 그의 입언저리는 그 후 나의 뇌리에 그대로 박혀 버렸다. 손에는 묵주를 가지런히 쥐고 계신 채….
선종하시기 전 자택을 처음 찾은 것은 하야후 소위 「二主黨 사건」이 났다고 하던 때였다. 이 사건은 당시의 군사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장 박사가 음모한 것이란 내용이다. 어느 하루 느닷없이 혜화동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받아보니 장 박사였다. 곧 좀 올라오라는 것이다. 전화를 놓고 그 길로 혜화동으로 달려갔다. 장 박사는 바깥채 서재에 계셨다. 그렇게 무덥지도 않은데 장 박사는 『좀 덥지?』하면서 에어컨을 손수 키셨다. 총리택의 에어컨치고는 너무 털털거려 켜자마자 소리가 요란스레 울렸다. 장 박사는 『그 사람들이 어쩌자고 알지도 못하는 일을 꾸며서 사람을 또 못살게 구는데…』하시며 세상에 퍼져 돌아다니는 사건의 내막을 물으셨다. 나도 들어서 알고 있는 것밖에 없어 그대로 말씀을 드렸다. 장 박사는 몇 번이고 혀를 차며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다. 장 박사는 당시 성당 다니는 일 외에는 일체 바깥세상과는 끊고 조용히 칩거하고 있었다.
장 박사는 언제나 조용하였다. 근엄했다고 할까. 야당 생활을 할 때나 부통령으로 재직할 때나 혹은 총리로 재임할 때나 언제나 한결같이 조용했다. 그런 모습은 5.16 당시에도 그랬고 하야후 은둔하고 있을 때도 변함이 없었다. 한 번도 격앙하거나 흥분하거나 낙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장 박사는 평신도이지만 수도자의 자격을 지니고 살아왔다. 사실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수도자와 같이 경건함과 온화함과 그리고 결연함을 나타내 보였다. 선종시 굳게 다문 그의 입술은 이런 모든 것을 얘기해 주고 있었다.
4ㆍ19 혁명후 한 반년 지났을 때다. 그러니까 장면 박사가 민주당 정부를 세운지 3, 4개월 밖에 되지 않았을 때다. 나는 월남정부의 초청으로 월남에 다녀오게 되었다. 당시의 고 딘 디엠 월남 대통령을 회견하고 홍콩을 거쳐 막 돌아오는데 고 대통령에 대한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이 쿠데타는 곧 진압되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이 쿠데타와 월남의 베트콩 준동에 대해 르포를 쓰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총리실에서 전갈이 왔다. 내용은 장 총리께서 월남 쿠데타에 크게 심려하고 있으며 월남의 사태추이에 주의를 쏟고 있으므로 쿠데타 기사로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도 군부 내 일부세력이 정권을 노려 꿈틀거리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었다. 독재와 부패의 상징으로 되어온 자유당 정권을 「못 살겠다. 갈아보자」고한 4ㆍ19의 외침으로 쓰러트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무슨 정변이냐는 비판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몇달뒤 5ㆍ16군부 쿠데타는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민주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조치해온 군부의 불장난을 장 박사는 끝내 끄지 못한 것이다.
5ㆍ16 사태 직후 나는 장 총리가 중앙청 회의실에서 사퇴 성명을 읽을 때 다시 마주쳤다. 총리는 『발전된 민주국가를 세워주기 바란다』고 사퇴 성명을 읽은 뒤, 부서진 태안경을 살며시 추스르며 삼엄히 둘러싼 군인들과 함께 뒷문으로 사라져 갔다.
장면총리는 재직시 「부패」하지도 않았고 「무능」하지도 않았다.
국토개발을 해서 경제재건을 하려고는 했어도 국민은 「기아 선상」에 몰아 붙이지는 않았다.
6ㆍ25날 새벽 잠자리에 든 미국 트루만 대통령을 일깨워 그의 무릎을 붙들고 흔들면서 『한국을 도와주시요』하고 자유 우방의 지원을 요청했던 장 박사. 그는 「반공」을 우리 「국시」라고 외친 첨단주자였다. 1백만 시민이 운집한 한강 백사장에서 독재와 부정을 몰아내고 참된 민주국가를 세우자고 외치던 장 박사.
그는 민주투사였다.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그만큼 싸운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장 박사에게 지금도 한 가지 한이 있다면 왜 5ㆍ16군사 쿠데타가 났을 때 그 쿠데타 세력과 끝까지 싸워 이를 분쇄하려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언젠가 이렇게 장 박사는 말했다고 들었다.
『무수한 시민들이 피를 흘리게 할 수야 없지…』
5ㆍ16 쿠데타 후 서슬이 시퍼런 군부세력이 민주당 각료들의 가택을 뒤져 부정과 부패의 꼬투리를 잡으려 했지만 나온 것은 어떤 장관 집에서 찾아낸 아이스박스 한개였다. 냉장고도 아니라, 더구나 몇천억원이 든 박스도 아니다. 무엇을 보고 「부패」했다고 했을까? 장면 총리는 모든 공무원들이 점심때 외식하러 나가지 말라고 금했다. 자신도 집무실로 도시락을 싸들고와 점심을 들었다. 야당과 신문이 민주당 내각을 「도시락 내각」이라고 비꼬았다. 도시락 내각은 부패 내각이 아니다. 장 박사는 오래토록 정치생활을 했지만 금전적으로는 티끌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청렴하고 결백했다.
부통령 시절 서울 시내 순화동 공관에서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조병옥, 박순천, 곽상훈, 윤보선 제씨)들이 회의를 개최해도 그 자리는 차 한 잔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근엄하게 얘기만 조용히 나누었다. 한 푼도 아낀다는 말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군사정부와 준군사정부로 점철된 30년의 한국 현대정치사는 어디를 들춰도 얼마나 질퍽거렸던가?
장 박사는 수도자 같은 민주투사였다.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포즈는 너무나 꼿꼿했다. 부정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가 있었다면 5·16군사 세력들에게 정권을 물려준 것 뿐일 것이다. 그로부터 민주주의는 시들어 갔지만 그가 시민들에게 꾸준히 못박아온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과 민주주의 정신은 지금도 팔팔하게 살아 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세우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모습은 바로 30년 전 장 박사를 위시한 여러 민주투사들이 그려 놓은 그 모습임을 우리는 깨닫고 있다. 장 박사는 우리에게 한 경건한 민주주의를 심어주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이 경건한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장 박사는 그와 함께 민주투쟁을 해온 많은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맞아들였다. 교회 안에 들어 온 정치인들은 5ㆍ16 후에도 변함없이 교회 안에 머무르고 또 장 박사를 따랐다. 장 박사는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의의 초석이자 또 한국 천주교회의 한 반석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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