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0월30일,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보니 남편은 오늘도 자고 있었다. 마음이 심난하였다. 오늘 처음 성당에 가보았다. 10시 미사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마음은 슬펐다. 들리는 목소리는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지만 머리속에 스치는 것은 신부님 목소리와 모습뿐. 그리고 지난 날 믿었던 무당 얼굴, 집에 누워 있는 남편의 모습.
신자들의 성가소리 들렸다. 견디기 힘든 시련에 마음을 의지할 길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무엇이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싶었다. 미사가 끝나고 집으로 갔다가 식당으로 와서 점심시간 일을 마치고 오후 늦게 집에 갔다. 동네 사람 몇몇이 와 계셨다. 남편이 운명할 것 같으니 준비하라고 한다. 나는 어리둥절 하면서 성당에 연락하고 나서 남편을 편안하게 누이고 옷을 찾아서 입혔다.
신자들께서 오셔서 기도를 해주고 떠난 후 그 남편은 말도 한마디 없이 눈만 떴다 감았다 하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왠지 모르게 나는 마음이 차분해지고 당황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남편의 임종을 동네에 알렸다. 다시 많은 신자들께서 오셔서 밤 늦게까지 연도를 드리고 기도를 해주셨다. 구역장님께서 장례절차를 준비해 주시고 일러주셨다. 수녀님들과 신부님께서도 오셔서 무사히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가셨다.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르고 지난 날들과 앞으로 살아 갈 날들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또 다시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진 것 같아서 고맙기도 하고 부끄러웠다. 남편의 병환과 죽음의 시련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났지만 하느님께서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우리 가족을 구원시켰다. 이때가 큰 아이는 고등학교 3학년, 아들은 고등학교 1학년, 막내딸은 중학교 1학년이었다. 3남매는 그전부터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새로운 이름으로 나도 열심히 성당에 다녔다.
우리 식구는 살던 집에서는 무서워 더 이상 못 살고 방 한 칸 월세방을 얻어 이사했다. 어느 새 큰 아이는 졸업하고 직장에 다녔다. 큰 아이를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온다. 차라리 제 뜻대로 전문대학이라도 갔으면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을텐데 전문대학이라도 가고 싶어한 것을 보내지 못하고 직장에 다니게 한 것이 마음이 괴로웠다.
나는 몸도 마음도 모두 약해지고 지쳤다. 숨은 차고 온몸은 퉁퉁 부었다. 관절뼈까지 약해졌다고 한다. 다리도 너무 아파 쑤시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걸을 정도였다. 저녁만 되면 자다 말고 온 몸이 아프고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꿈을 꾸면 쫓기는 꿈을 자주 꾸어 신음할 때도 많았다. 때로는 혼자 자다 보면 온 몸에 맥이 돌지 않아 죽어가는 시체와도 같이 느껴졌다.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병을 고치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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