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여러 교구에서 이미 교구 단위의 시복시성 운동이 추진되어 왔고 또 추진되고 있어 조만간 그 열기는 또 한번 이 강산을 뒤덮을 기세다.

전주교구를 비롯 몇몇 교구는 이미 그 청원서를 작성해 교황청에 접수시킨 상태이며 그 뒤를 이어 대구대교구를 비롯한 다른 교구에서도 그 지역의 연고 순교자들의 장하신 업적을 발굴 조사하고 정리하여 시복시성 운동에 동참하고 있어 이 땅의 순교 신앙선조를 자랑으로 여기는 많은 신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순교사는 그 역사적 특성상 많이 소실되고 충분히 기록 보존 되지 못한 부족한 자료로 인해 교황성하의 관대한 기적심사 관면으로 103위나 되는 성인을 모시게 되었다.

정상적으로, 103위의 성인을 모시고 있는 나라라면 수천 명의 복자를 또한 아울러 모시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모진 박해로 그 기록이 충분히 남아 있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우리 민족이 갖는 냄비정신, 즉 곧 끓었다가 금방 식어버리고 마는 특성이 우리 교회 안에도 스며있는 우매함 때문이 아닐까 하고 안타깝게 여겨짐은 왜일까?

우리나라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길만한 위대한 교회작곡가이신 고(故) 이문근 신부님, 그분이 그토록 감격해 하며 써서 바친 「복자찬가」는 2백주년을 지내면서 우리교회가 공식적으로 「순교자 찬가」로 둔갑시켜 버리는 우(禹)를 범했다.

2백주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여러 작곡가들에게 위촉하여 「103위 순교 성인」과 「이 땅에 빛을」이라는 노래도 만들었다. 필요하다면 「순교자 찬가」나 「성인 찬미가」를 새로 작곡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작곡하신 이문근 신부님이 만일 살아 계셨더라면 그렇게 되도록 두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성인탄생은 세계가 기뻐하며 경하할 일이다. 그러나 기쁨에 들떠서 원칙이 흐트러지는 것을 용납하는 것은 바람직한 교회상이 아니다.

모 교구의 경우 복자들의 영성을 본받고자 세워진 「복자성당」이 어느새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동네이름인 신천성당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 성당의 뜰에는 아직 시복 시성되지 않은 이 지역의 순교자 세분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만일 이분들이 복자 위에 올랐을 때 다시 복자성당으로 명칭을 변경할 것인지….

우리 교회가 이래선 안 된다. 좀 기다릴 줄 알고 기다림의 신비를 살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동네 이름을 붙인 성당도 각각 주보를 공경하고 있다. 특히 그 주보를 본당 이름으로 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가고 있는 것과 상이해 마음이 아프다.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시복시성 운동에 참으로 반가운 마음으로 한 한마디가 비판뿐인 것 같다. 그러나 기백의, 아니 기 천의 복자들이 이 땅에 새로 나시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에 그 운동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감히 이 글을 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