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이 있듯 친구따라 간식 얻어먹는 재미로 교회를 다니면서 결혼 전까지 열심히 다녔다. 오빠의 중매로 만난 남편과 약혼식을 하고 나서야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알았다.
내 신앙을 버리고 남편따라 성당이라는 곳을 가보니 신부님의 강론은 외국신부여서 알아들을 수도 없고 미사시간엔 왜 그리 졸립기만 하던지, 일년이 넘도록 남편따라 마지못해 끌려 다녔다.
이듬해 봄 성당에서 봄소풍을 가기에 임신 6개월의 몸으로 쫓아갔다. 오는 길에 군종신부님의 오토바이에 타라기에 생전 처음 남자뒤에 타기가 쑥스러워 유치원 아이 하나를 앞에 앉히고 나는 발을 모은 상태에서 오토바이에 앉았다. 조그마한 개울이 나오자 신부님은 더 빨리 속력을 내시며 달리셨다. 개울을 다 건너자마자 순간 나는 「꽝」하고 떨어졌다.
깨고 보니 병원이었고 신부님, 교우들, 남편이 보였다. 남편은 늦게 결혼하여 얻은 아이여서 무척 좋아했는데 유산이 되면 신부님이 얼마나 난처해하실까?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성모 마리아상이 눈에 들어왔다. 다급한 마음에 『어머니는 정말 계십니까? 성모 마리아여, 어머니가 진정 계신다면 이 아이 유산만 안 되게 해주십시오. 딸을 낳으면 수녀원엘, 아들이면 신학교에 보낼 것이니 어머니, 지금 유산만 안 되게 해주십시오』하고 기도드렸다.
성모님의 덕분으로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 지금은 군에 가 있는 큰 아들 바오로의 일이다. 그때부터 재미가 나고 묵주기도 하는 법도 배웠다. 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중 78년 9월20일, 레지오가 창설되었다. 나는 아이 둘을 업고 걸리면서 바쁘게 활동하고 살았다. 그러던 중 레지오 단원들이 친언니처럼 따르던 자매님이 돌아가시자 친척도 자식도 없다는 이유로 남편이 화장할 것을 주장했지만 레지오 단원들이 가족처럼 나서서 밤을 새워가며 장례미사를 봉헌하는 등 무사히 장례를 마치고 나니 동네 사람들이 성당사람들을 모두 부러워했다.
레지오 단원이 사망하면 내가 활동한 만큼, 기도한 만큼 그대로 받는다는 것을 볼 때 레지오를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어머니가 담석과 위암으로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병이 들자 수발할 사람이 없어 내가 모셔와야 했다. 어머니 병원비를 여기저기 빌리러 다녀야 했고 퇴원했다가 다시 입원하기를 열번, 긴병에 효자 없다고 했듯이 너무 짜증도 나고 신자가 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시어머니는 점점 쇠약해져 갔고 치매가 온 후 아예 몸저 누웠다.
그때 큰 아들 바오로가 고2때 였는데 신학교를 가겠다고 했다. 나는 받아들였지만 남편은 반대했다. 그러나 아들이 신학교 시험에 떨어졌다. 나는 20년전 성모님과 한 약속을 지키려고 했는데….
시어머니가 위암이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도 죽을 만들어야 했고 대소변을 받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지오도 쉬어야만 했다.
자식이 없으면 도망도 가고 싶었고 신자가 아니라면 모시기 싫다고 말하고도 싶었다. 혼자 울면서 위로도 했고 미워도 했다. 부모는 우리를 먹여주고 키워주셨듯이 늙으면 자식이 부모님을 보살펴 드려야 함을 깨우쳐 가면서….
남편과는 직업상 함께 살지 못하고 나와 아이들만이 시어머니 수발하면서 살았다. 한밤 중 무서운 생각이 들 땐 성모송을 바치면 무서움이 사라졌다. 주말이면 집에 오는 남편과 싸우기도 많이 했다.
어느날 시어머니가 피고름이 나는 대소변을 사방에 보셨다. 청소를 하려니까 악취가 나서 주님께 『차라리 내 코를 병신으로 만들어 냄새를 못 맡게 해달라』고 투덜거리며 이야기했다. 얼마가 흐른 뒤 냄새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주님께서 불평하면서 내던진 내 말을, 주일미사도 레지오 활동도 못하는 내 말을 들어주심을 알고 잘못했다고 빌었다.
나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병수발을 하면서 너무 배우는 것이 많았다. 그렇게 4년여만에 시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구역 레지오 단원들이 제일 먼저 와서 모두들 내 일 같이 일했다. 나는 지금도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얼마 뒤 남편이 모범용사로 뽑혀 진급도 했다.
그때는 절망만 있고 희망은 전혀 없어보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신앙인으로서 더욱 성숙해짐을 느끼고 내가 살아가는데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 더군다나 병드신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일인지 잘 알게 되었다.
지난 4월 남편은 그 어렵다는 모범용사에 또 다시 뽑혔고 6월에는 복무 30주년 행사도 가졌다. 3남매의 앞길을 주님이 알아서 키워주심을 맡기고 사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언제나 착하고 건강하게 자라준 아이들이 고맙기만 하다. 이제는 레지오 단장으로서 임무를 충실히 하고 봉사하며 살아가고자 다짐한다. 건강 주시는 날까지 단원으로서 충실히 살겠다는 약속을 주님께 하면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