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자그마한 뒷마당에 키워 족히 70여 개는 따먹었던 오이 생각이 났다. 두 그루뿐이었지만 숯불에 삼겹살 구워먹을 때마다 원없이 따먹었던 깻잎 생각도 났다. 땅 넓은 미국서야 뒷마당도 흔해서 거름 넣는 노고가 없어도, 훌훌 듬성듬성 씨를 흩뿌려도, 그저 간간이 잡초만 좀 뽑아주면, 다수확의 욕심만 없으면 이런저런 야채들을 솔찮이 수확할 수 있었다. 비좁은 서울서야 땅 욕심을 부릴 수가 없어서 그만 옥상에다 채소밭을 차렸다. 일주일에 한두 번 동네 어귀를 어슬렁거리면 인터넷으로 고기나 냉동식품 등을 주문해 내용물은 쏙 빼먹고 재활용품 틈새에 내놓은 스티로폼들이 꽤 있어 열 서너개쯤 주워다 놓았다. 여기저기서 흙을 담아다가 지렁이똥을 섞어 놓으니 옥상 채소밭으로 그럴 듯하다.
씨 뿌린지 한 달이 좀 넘으니 제법 싹들이 텄고, 반 이상은 훌쩍 키가 컸다. 원체 밭이 작아 수확이야 뭐 얼마 되겠는가마는, 그래도 기대하는 건 오이다. 밭 크기랑 상관없이 가지가 뻗어나가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니 스티로폼이 웬만큼만 뿌리를 품어주면 매어놓은 줄들을 타고 한정없이 클 것이다. 오이 중에서도 마디 오이라는 녀석을 키우는데, 마디가 생길 때마다 꽃과 열매가 한두 개씩 생겨나는게 여간 신기하지 않다. 지금이야 새끼 손톱만하지만 노랗게 꽃이 피면서 금방 자라난다. 마디마다 오이가 생긴다고 해서 마디오이인가 보다.
지난해 그 오이의 마디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잡념들에 싸였던 적이 있다. 오이 줄기에 마디가 없었더라면, 꽃과 그 열매인 오이는 언제 생겨나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을 것 같다. 제가 언제 나서야 할지를 모른다면, 시간과 자리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아마도 오이는 그토록 서로 닮은 모습으로, 고르게 촉촉한 물기와 영양분을 품고 태어나서 자라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마디는 꽃이 필 자리와 시간을, 열매가 맺을 시간과 장소를 일러주기 위한 나름의 질서정연한 시간표가 아니었을까?
대나무는 마디가 노골적이다. 대가 다른 아름드리들처럼 둥지가 굵지도 않으면서도 그리도 높이 곧게 자라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마디 때문이라고 한다. 야들야들 유연하게 마디가 하나도 없이 자라나는 풀들이 키가 작은 걸 보면 그럴 법도 하다. 어쩌면 나무를 베면 보이는 둥그런 나이테도 마디 같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시간의 나이테다. 생긴 모양과 수에 따라 그 나무가 겪어야 했던 세월과 풍파가 드러난다니까.
오늘이 내일 같은 하루하루. 어제나 오늘이 구분되지 않는 구태의연한 일상들이라면, 어디 시간의 마디가 구분이나 될 것인가? 시간 속에 생기는 마디들을 알아채지 못하면, 나는 우리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할 때와 장소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정신과 마음이 자라나지 못할 것이다.
사실 마디는 고통의 흔적이 아닐까? 그저 순탄하고 순조롭게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자라날 수 있었다면 아마도 그 응어리가 생기지 않을 듯싶다. 시간의 마디들을 견뎌내고, 세월이 주는 부단한 풍파, 뜨거운 햇볕과 차가운 밤바람을 견뎌내느라 마디는 생겨난 것 같다. 그래서 하나의 고통을 이겨냈을 때, 그 대견함에 대한 스스로의 격려와 치하가 마디로 굳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들을 했다.
내 마음과 정신이 어찌 순탄하게 따사로운 햇빛만 품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도무지 내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하느님을 향해 가는 여정이 어떻게 순조롭기만을 바랄 수 있을까. 돌부리에 걸리고 때로는 아예 등지고 돌아서고 싶을 때가 아마도 더 많았으리라. 하지만 바로 그것이 바로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마디가 될 것이다. 마디는 결코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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