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낙태
6월 9일 토요일 오전. 서울시청 앞 잔디밭 광장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생명대행진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2천여 명의 열기가 작열하는 초여름의 태양보다 더 뜨거웠다. 이날 특히 주목을 끈 장면은 행사장에 수녀와 신부들이 수십 명의 아기들을 안거나 손을 잡고 걸어서 데리고 입장한 것이었다. “수녀님들이 웬 아기들을?” 하던 궁금증은 꽃동네 오웅진 신부의 강론으로 곧 풀렸다. 이 아기들은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이 낙태를 하려고 하는 것을 설득하여 세상의 빛을 보게 됐고 돌볼 사람이 없어 꽃동네 천사의 집에서 키우고 있는 아이들이다.
요즘 우리는 죽음의 문화와 생명의 문화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한다. 그만큼 죽음의 문화가 만연되어 있다는 방증이다. 낙태와 자살률이 OECD 회원국 중 최고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고 우리의 아이들을 미국으로 “수출”하는 순위도 세계 4위라는 수치스런 현실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정부의 쿼터제 실시로 해외 입양 숫자는 줄었지만 국내 입양은 늘지 않고 있다. 뒤집어보면 낙태나 기아가 그만큼 늘고 있다는 말이다.
낙태반대운동 ‘생명대행진’
생명대행진(March for Life)은 1973년 1월 23일 미국 시민들이 낙태를 허용하는 연방대법원 판결에 반대해 처음 개최한 이래 매년 같은 날 ‘낙태는 태아와 여성을 향한 폭력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이어 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낙태반대운동도 공교롭게도 1973년 낙태를 합법화한 모자보건법 제정으로 비롯됐다. 1990년대 초 본격화 됐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생명운동으로 발전했다. 2010년 프로라이프의사회가 처음으로 조직됐으며 같은 해 프로라이프 청년회, 변호사회, 교수회가 잇따라 발족됐다. 지난해 6월 18일 이 단체들이 프로라이프연합회를 결성해 이날 처음으로 생명대행진을 실시한 것이다.
생명 윤리에 반하는 ‘사후피임제’
그러나 이러한 낙태반대운동이 무색하게 정부에서는 사후피임제에 대한 의약품 분류를 전문의약품에서 일반의약품으로 바꾸는 안을 발표해 “정부가 결과적으로 낙태를 조장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7일 발표한 의약품 재분류안에 따르면 사전피임제는 일반의약품에서 전문의약품으로 전환되는 반면 사후피임제는 일반의약품으로 완화돼 의사의 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입하여 복용할 수 있게 된다.
사후피임제는 수정란의 착상을 막는 사실상의 낙태약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약품을 자유롭게 구입하게 하는 것은 생명 윤리에 반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이 시작된다”(인공유산 반대선언문)며 인간 생명의 시작을 수정의 순간부터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후피임제의 문제점
사후피임제의 임의 구입 허용은 그렇잖아도 문제가 되고 있는 불륜이나 청소년들의 성 문란을 더욱 조장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서 미국 보건부가 최근 식품의약품안전국(FDA)의 결정을 뒤집고 사후 피임제를 17세 이상에만 처방전 없이 판매하는 나이 제한 규정을 유지하기로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 사후피임제의 피임 실패율이 15% 수준으로 상당히 높기 때문에 결국 낙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점이다. 사후피임제를 일반약으로 전환한 미국·영국·노르웨이·스웨덴·중국 등에서 기대했던 낙태율은 줄지 않고 청소년의 임신과 성병 유병률만 높아졌다는 사실도 지적되고 있는데, 지난 2001년 사후피임제를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한 스웨덴에서는 6년만에 낙태율이 17%나 증가했다고 한다.
의료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사후피임제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후피임제는 일반 피임약에 비해 10~15배의 강력한 고용량 호르몬제이기 때문에 적정하게 사용한다 하더라도 여성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반복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불임 등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공청회 등을 통해 이번 재분류안에 대한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이르면 다음달 중 확정할 계획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의 신중한 선택을 기대한다.
김태식(토마스) 회장은 1978년 영자신문 코리아 헤럴드에 입사, 경제부·정치부 기자로 활동했으며, 1981년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에 입사해 해외경제부 차장, 영문경제뉴스부 부장 등을 역임, 현재 연합뉴스 국제국 기획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서울 가톨릭신문·출판인협회 회장에 이어, 올해 2월부터 서울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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