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5월 쌍용자동차의 경영진은 경영상의 이유로 노동자 총인원의 36%에 달하는 2,646명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발표했다. 노동자들은 그해 5월 22일부터 8월 6일까지 77일 동안 파업을 했다. 마침내 구조조정 대상자 가운데 461명을 무급휴직하고 1년 뒤 생산물량에 따라 순환근무가 이뤄질 수 있도록 주간연속 2교대제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2012년 오늘까지 해고 또는 무급휴직에 놓인 노동자와 그 가족 가운데 22명이 죽었다. 이 가운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무려 12명이다. 다른 경우도 심근경색 및 돌연사, 뇌출혈, 당뇨합병증 따위로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사망원인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사람들 역시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의 약 50%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80%가 중증도 이상의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이 현상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필자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무자비한 폭력’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도 모자란다면 ‘사회적 타살’을 덧붙일 수 있겠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경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기업은 위험과 기회(위기)를 맞을 수 있다. 쌍용자동차의 경우 그 위험의 책임은 고스란히 노동자가 짊어지고, 기회는 경영인과 투자 자본가의 몫이었다. 그래서 무자비한 폭력이다. 둘째, 무자비한 폭력(사회악)을 막고 공동선을 실현해야 할 국가공동체(정부)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은 무책임한 기업의 해외매각(상하이 자동차-마힌드라&마힌드라)과 그에 따른 대량해고의 사회문제를 조장·방조했으며, 2012년 경찰청은 평택 쌍용자동차 노동자 파업 진압을 ‘경찰의 베스트 사건 10’에서 모범사례 5위로 선정했다. 마치 심판까지 한편에 가세한 운동경기와 같아서 무자비하다. 셋째, 보다 근원적으로 사회의 가치전도 현상이 가져온 결과이기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타살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의 주체인 인간은 수단이 될 수 없다. 그 자체로 목적이다. 자본은 어디까지나 여러 생산 수단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금은 자본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사람과 사회를 지배하는 형국이다. 쌍용자동차의 경우 정치공동체(정부)와 사회가 사람에게 봉사하지 않고 자본 앞에 무릎을 꿇고 충실히 섬긴 전형적인 모습이다.
교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믿고 가르친다. 이는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약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각을 의미한다. 시각에 따라 같은 사물도 달리 보인다. 공동선을 이야기할 때 교회는 우선 사회적 약자의 눈으로 사물을 보라고 가르친다. 둘째,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도덕적 관심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선을 실현할 때 무엇보다도 우선 가장 약한 입장에 있는 이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해방과 역량 강화를 의미한다. 첫째와 둘째 의미의 우선적 선택이 가진 자의 갖지 못한 자에 대한 동정심 정도로 환원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안에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원리’를 두 번째 의미인 도덕적 관심 혹은 선심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대단히 강하다. 약자의 입장에 서서 사회현상을 보려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의 해방과 역량 강화를 위한 사회적·제도적 접근을 교회의 사명이라 보기보다는 세상일에 간섭하고, 그럼으로써 교회를 분열시킨다고 이해한다.
무려 22명을 이 세상에서 떠나보냈고, 아직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고 있으며,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이때,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까지 한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와 연대하기로 했다. 그 한 방법으로 해고자 및 유가족들을 비롯하여 무분별한 대량해고 사태로 고통을 겪고 있는 노동자들을 위한 모금 운동을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교회 단체에 권고했다. 이를 계기로 교회가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것”(사목헌장 1항)으로 삼으면 얼마나 좋을까!
“소수의 ‘소유’(所有)가 다수의 ‘존재’(存在), 즉 인간됨을 손상시키는 사회현실에서… 존재의 복음을 가르쳐 주어야 할 교회가 더 소유하기 위해 애를 쓴다면 이는 교회의 길을 벗어나는 일이다.”(요한 바오로 2세, 사회적 관심 31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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