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바람도 한숨에 오르지 못하는 지리산 노고단 봉우리를 찾았다.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은 섬진강변 하얀 모래가 바람결에 떠밀려 오르다 머물렀는지 정결한 산모래 길이다. “사박사박” 강물에 모래 쓸리던 소리가 발길을 따르고, “카 카 카 코” 숲을 울리며 검은등뻐꾸기가 흘낏흘낏 동행했다. 걸머지고 온 껍데기를 홀딱 벗고 오르라는 소리로 들려 ‘홀딱 벗고’ 새라는 별명을 가진 검은등뻐꾸기의 기성이다. 무엇을 홀딱 벗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심히 걷기만 했다.
사박사박 걸어가는 온몸을 푹 적시는 안개는 저 아래에서 치어다 볼 때 산봉우리에 걸린 구름일 것이다. 어쩌다 비껴드는 햇살도 두터운 안개에 지레 놀라 뒷걸음질치는 막다른 산길에 정연한 나무계단이 봉우리로 이어졌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한 계단 끝에 이르렀다.
운 좋게 지리산 십경 중에 으뜸인 노고단 운해에 서게 되었다. 한 치 앞, 한 길 아래 벼랑도 내려다 볼 수 없는 짙은 구름바다였다. 그런데 운 좋은 것도 봉우리에 선 뿌듯함도 잠시, 무거운 구름바다가 휘청거리는 세찬 바람이 불었고, 이 한 몸뚱이가 아득히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무서움에 홀로 온 것마저 후회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루 같은 광경이 두려움에 벌벌 뜨는 눈앞에 펼쳐지지 않겠는가. 노랑원추리 꽃무리가 가파른 벼랑에 피어 있었다. 노랑원추리는 생명의 환희 속에 눈부시게 의연했다. 이토록 놀라운 은총이란….
뭔가 붙들지 않으면 떨어져 버릴 것 같던 두려움이 어느새 가슴 벅찬 기쁨으로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눈물바람밖에 할 수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바람도 구름도 머물지 못하는 강파른 데에서도 생명의 꽃을 사람 곁에 두셨다. 생명 하나만으로 바랄 것 없는 놀라운 은총이었다. 살아가는 일이 그대로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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