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원래 좀 엄숙했다. 말하기를 즐기지도 않았고 진지했으며, 경건하기까지는 않았어도 주위 사람들에게 꽤 무게 있어 보이는 이미지를 형성하려고 노력했었다. 아주 가식적으로. 그러다가 정말 유머가 얼마나 심오하고 따뜻한 것인지, 그리고 약간의 파격이 얼마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정신을 확장시켜줄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 ‘천국의 열쇠’라는 소설이다.
완고하고 경건하기 이를데없는 아일랜드의 기질을 평생 고수했던, 겉보기에 볼품없던 치셤 신부. 그는 자신의 완고함이 인간적 결함이었음을 스스로도 깨닫고 있었으며, 스스로 하느님 앞에서 비천한 인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전혀 매력이 없다는, ‘근본주의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겸손’에서 헤어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서 보이는 유머와 해학은 예술적이었다. 말년에 그가 사순절 기간에 한 강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었으나 유머로 치면 오히려 공자 쪽이 한 수 위였다”라든가, 신학생 시절 연어 낚시 뒤에, 주교가 탄 기차가 지나는 모습을 보고 아차 싶어 주교를 마중가기 위해 알몸으로 강을 건너던 신학교 학장과의 한때라던가 하는 것들이었다.
엄숙함 속에서도 유머와 해학이 가능하고, 경건함에 싸여 있는 가운데에서의 약간의 여유와 파격이 오히려 더 배꼽 잡는 유머의 바탕이 될 수 있음을 이 인상적인 책은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비밀은 겸손과 사랑이었다.
예수님도 정숙하고 단정하기만한 모범적인 ‘인성’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행히 성전에서 찾았지만, 소년 시절에 일찍이 가출을 배우셨고, 커서도 부모님 속을 꽤는 썩이셨다. 간음한 여인이 돌을 맞을 뻔한 장면도 재미난다. 엄숙함의 대명사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여인을 끌고 와 죄를 묻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그들의 사악함을 간파한 뒤, 말을 않고 땅바닥에 몸을 굽혀 딴청을 하신다. 도대체 땅바닥에 뭘 쓰셨을까? 잠시 후 몸을 일으킨 다음 죄 없는 자부터 돌로 치라시더니, 다시 딴청을 하신다.
필자는 지금도 궁금하다. 대체 뭘 쓰셨을까? 어찌할까 시간을 벌기 위해 딴청을 하신 건 아닐까? 뭔가 중요한 일을 하시는 척하다가 옳거니 하고 그런 묘안이 떠오르신 건 아닐까? 하는 생뚱맞은 궁금증이 일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이 장면을 떠올리면, 아무렇지 않은 듯 몸을 굽혀 딴청을 하시는 모습이 왜 그리도 우스운지.
엊그제 한국 축구가 영국을 이기고 올림픽 4강에 진출했던 당시, 편파적인 심판에 흥분한 선수들을 다스린 홍명보 감독의 일갈이 참 흥미로웠다. “영국 봤지? X도 아니잖아!” 홍 감독은 무섭다. 웃지도 않고 엄하고 엄숙하다. 그런 ‘선생님’의 욕지거리를 듣고 ‘피식’ 하면서 후배들은 온 몸의 긴장과 흥분을 털 수 있었을 것이고, 여유와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자칫 우리는 지나친 형식주의와 엄숙주의에 빠져 경직된 사고와 행동이 항상 옳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치셤 신부나 예수님이나 홍 감독이나 모두 파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들의 파격, 그리고 그 표현으로서의 유머는 한결같이 깊은 배경을 담고 있기 때문에 결코 진지한 일탈로 여겨지지 않는다.
치셤 신부의 파격과 유머는 이미 스스로가 얼마나 미소(微小)한지, 하느님이 얼마나 크신지 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극적이고, 예수님의 유머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 속에 하느님의 뜻이 관철되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며, 홍 감독의 파격은 최선을 다했으니, 더 욕심을 낼 것도 없으며, 후배들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값진 것이다.
결국 파격과 유머는 자신과 이웃에 대한 확신과 사랑,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과 그분의 뜻에 맡기려는 겸허한 자세에서 가능하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형식과 제도, 가식과 허례에 굴복해 스스로를 헛되이 치장하고, 다른 이들을 부당하게 판단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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