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모든게 부족하고 어려웠던 그 때에 설날은 특별한 기쁨을 주는 날이었다. 진작 그 당일 보다는 그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하루하루가 더 즐거웠고 신났던 기억이다.
방앗간에 쌀을 빻으러가고, 강정을 만들기 위해서 뻥튀기기 가게에 가는 일, 그리고 수정과를 담기 위해 생강 껍질을 벗기는 일 등은 으레 동생과 나의 몫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이런일을 시키시면 중요한 임무라도 말을 병사마냥 뿌듯한 마음으로 단숨에 시장으로 가게로 달려가곤 했다.
집안에서는 어머니와 언니들이 제사 음식 준비하느라 분주하고, 부침개 부치는 기름냄새가 온 집안 구석구석 배어가면서 웃음이 흘러 넘치는 날들의 연속이 설날을 손 꼽아 기다리는 그때의 우리들의 슬프고도 즐거운 현실이었다. 밤이 되어 온 식구가 둘러 앉아서 꾸들꾸들 해진 떡 가래를 썰때면 우리형제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더 예쁘게 썰려고 애를 쓰곤 했다. 『아유, 누가 이렇게 예쁘게 썰었노』하시는 어머니의 한마디 칭찬이라도 들을라치면 비록 팔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아도 더 예쁘게 더 열심히 썰던 순진한 마음도 가져 보았다.
땅콩이 조금 이라도 더 들어간 강정을 먹으려고 동생과 다투던 기억, 유과를 만들기 위해서 찹쌀가루 튀긴것을 말리려고 내어준 안방 아랫목에 대한 미련이, 다락방에 가득히 쌓여 있는 여러가지 음식이면 선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기꺼이 도다리 눈이 되길 원했던 그 순진스러운 마음이 그립다. 굳이 방앗간이나 상점에서 할수 있었던 일을 집에서 우리들보는 앞에서 하신 것은 우리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들을 남겨주기 위한 어머니의 세심한 배려때문이라는 눈물겨운 사랑이 새삼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그러나 나의 눈시울을 더 뜨겁게 하고 목이 메이게 하는 것은 그 추운날 그 많은 일들을 집에서 할 수 밖에 없었던 넉넉하지 못한 살림은 전혀 내색도 하지 않으신 채 우리 형제들에게 더 풍족하게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하시고 안타까워 하셨던 어머니의 그 깊은 마음을 이제야, 아이둘을 낳고 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사는게 월등히 나아져서 모든게 부족함없이 풍족해졌는데 어릴 적 어머님이 내게 해주셨던 그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을 어떻게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누릴 수 있게 해 줄까? 설날떄 몸소 보여주셨던 그 모습들이 모두 덕담으로 마음에 와 전해졌는데, 설날 아침 세뱃돈을 주면서 『공부열심히 해라』는 등의 단순한 몇 마디가 덕담이 될 수 있을까? 떡 대신 케익을 자르고 예쁘게 포장한 선물을 의무적으로 나누어주던 이 엄마를 훗날 아이들은 어떻게 추억할까?
건성건성 보내던 그 명절날이 지겨웠다고 말하면 어떻게 할까? 분명 조상님들이 이 명절을 정한 이유는 있을 것인데 시대가 변하였다고, 그 고유의 의미가 희미해졌다고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설날의 풍성한 감성의 텃밭을 빼앗아 버리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하게 된다.
다음설에는 내 어린시절 설빔 입기를 기다리며 설렜던 그 기억을 온전히 돌이켜서 설날 풍속의 아름다운 추억의 실타래를 풀어줘야겠다. 그리하여 세월이 지난 뒤에 우리 아이들이 그들 아이들에게 그 실타래를 다시 풀어서 그 실에 묻어 나오는 추억들로 그들의 아이들에게 설빔을 예쁘게 지을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는 의무가 지금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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