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가 아버지를 죽였다. 무언가 말 좀 하란다. 같은 교수요 게다가 신부이니 할 말이 많을거라면서. 그런데 할말이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이 글로 되어 나오지가 않는다. 소위 기(氣)가 막혀 통하지가 않는다.
수년전 본당과 학교를 오가며 바삐 살때부터 허리춤엔 점잖은 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는 삐삐가 항상 신호대기 중이다. 도대체 무슨 말로 운을 떼얄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 드르륵 진동이 시작된다.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동생이다. 대낮에 동생이 직장도 아닌 집에서 호출을 하니 순간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혹시 어머니가? 예감은 들어맞았다. 어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시다는 것이다. 즉시 병원으로 모시도록 하고 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를 부탁했다. 시동을 걸고 대구를 향해 날아간다. 이 순간만큼은 자동차 면허증이 비행기 면허증으로 바뀐다. 가슴은 계속 쿵닥거린다. 어머니 제발 회복하셔야지요! 수년전 뇌출혈을 당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나신 어머니라 그게 재발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진짜 큰일을 당하나 싶이 도무지 맘을 안정시킬 수가 없다. 운전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런데…그런데…난 부모가 편찮으시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는데, 돌아가실까봐 이렇게 불안해하며 하느님께 매달리고 있는데, 그 교수님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많은 점잖으신 동료 교수님들의 문상을 받아가며 슬프신 표정으로 아이고! 아이고! 장례를 치루었을텐데.
그분은 경제학 교수님이란다. 상속을 앞당겨 받아야 투자한 회사의 부도를 막게되어 있었단다. 경제가 사람을 잡았다. 애비잡는 경제학을 공부한 아들교수는 이렇게 스스로 자신마저 죽이고 있다. 지난 수십년 이래 경제개발, 경제 성장에 열화처럼 들떠 있는 민족이 얼마나 많은 동족을 죽이고 있는고. 폐수먹여 죽이고 중금속 발라 죽이고, 공장굴뚝의 연기 씌워죽이고 썩은 식품먹여 죽이고, 찔러죽이고 때려죽이고, 쏴죽이고 독약 먹여 죽이고, 돈 안준다고 죽이고, 미워서 죽이고 바람나 죽이고, 수정란도 없애고 태아도 긁어내고, 영아도 잡고 유아도 죽이고, 자기 새끼도 남의 아이도 골로 보내고, 청소년도 서로 처죽이고 엄마도 아빠도 찌르고 태우고, 잠자는 남편도 죽이고 노인도 갖다 버리고….
생명은 존엄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신성하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왜 존엄하고 신성할까? 미안하지만 그 대답은 없다. 왜냐하면 인간 생명의 존엄성, 신성성은 그 근거가 그 자체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떠어떠하기 때문에 존엄하고 신성한 것이 아니라 그냥 존엄하고 거룩한 것이 사람 목숨이기 때문이다. 삶은 근본적으로 가치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영성과 육체성이 있다. 사람을 그렇게 분리하자는 것이 아니라 편의상 인격의 구성요소를 그렇게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영욱이 분리될 수 없는 단일체인 인간은 그 육체가 상해를 받을 때 그 자신의 일부가 이니라 그 자신 전체가 상해를 받는 것이다. 사람의 육체는 곧 그 사람이다. 육체는 그 인격의 본질적 모습이다. 육체는 또한 그 주체를 객관세계에 드러내어 현존시키는 중개자이다. 인간은 그 영이 육체의 모습으로 화한 존재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나, 너, 그를 이루며 서로 믿고 의지하고 사는 것이 가족이요 공동체요 사회이다. 그래서 애비의 목을 찌른 자식은 애비의 인격 모두를 찌른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족 공동체의, 이 사회의 믿음과 신뢰를 찌르고 저주하고 오염시키고 파괴한 것이다. 아버지는 유일한 자율적 가치를 지닌 인격이었다. 그는 그러한 인격을 파괴했다. 그는 아버지의 자유로운 주체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는 자아실현을 하는 책임성있는 인격적 존재의 목에 칼을 들이댐으로써 그와 자신을 파멸시켰다.
하느님은 모든 자유 중 가장 근원적 자유이시다. 그 분은 유일신으로서 가장 개별적인 가치 중의 가치이시다. 그 분은 당신의 속성에, 당신의 피조물에 가장완전하게 책임을 지는 분이시다. 그 분은 당신의 그 자유를, 그 유리한 가치를, 그 책임성있는 존재의 일부를 그 경제학 교수의 아버지에게도 나누어 주셨다. 이렇게 볼 때 아들은 하느님을 진지하게 모독했다. 하느님과 구조적, 본질적 관계를 맺고있는 아버지의 존재를 거부함으로써 그 존재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거부했다. 외국 유학까지 해가며 배웠던 그의 경제 논리로써는 도저히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을, 사물을, 세계를 보는 그의 잣대가 오직 경제논리에 있을 때 아버지를 죽여서라도 돈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경제도, 경제학도,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거기에 앞서 철학이 필요하다. 신학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산다.
어머니의 병실을 나와 한마디 써주겠다는 말빚을 이렇게 갚고 있다. 제자들의 초롱한 눈망울들이 보인다. 어찌 그 앞에 설꼬. 나를 포함한 전국의 소위 교수들이란 작자들이여! 똥통에나 빠져죽자!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