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공주의 영명고등학교에서 근무하던 시절, 겨울이었다. 아내가 친정에 가고 혼자 집을 지키던 겨울이었다. 첫눈이 내렸다. 쌓이지 않는다는 규칙을 이기고 첫눈은 발목까지 쌓이고 있었다. 외투의 깃을 세웠다. 이쯤 되면 아내가 없는 쓸쓸함 보다는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건지고 있는 아저씨를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밤 열한 시에 귀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세상의 남편들은 먼저 생각한다. 우선 그때까지 남아있던 - 지금도 남아있지만 - 청춘의 잔해를 땅콩 한 줌으로 포장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기분은 네온 밝은 거리보다 뒷골목과 더 잘 어울렸다.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을 남기며 눈이 내리네 눈이 내리네 노래를 부르며 나는 가는 곳 모르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저기 골목 끝 정다운 연인의 그림자가 내 걸음만큼 느린 속도로 점점 확대되고 있었다.
우리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 가끔 학생과로 불려와서 반성문을 쓰기도 하던 아이, 관심도 없었고 따라서 이름도 몰랐으며 그저 문제가 많은 학생으로 기억되어 있던 그런 아가위 눌린 교사와 고개 숙인 학생. 이럴 때 교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육학원론에는 무엇이라고 적혀있을까……그때 내가 해줄 수 있었던 건 주머니 속의 땅콩을 그 여학생의 작고 언 손위에 놓아주는 일뿐이었다.
이듬해 2월. 지금의 근무지로 옮기며 눈발이 분분하던 운동장에서 이임인사를 마치고 돌아온 책상 위에는 아, 은박지로 포장된 한 됫박 남짓의 땅콩이 프리지아 꽃향기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이란 병든 소녀의 작고 언 손위에 올려주는 땅콩 몇 개.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하던가? 열 배 백배 부풀어 있는 내 마음 속의 땅콩.
지금까지 집필해주신 이명기 수녀님께 감사드립니다. 금주부터는 김상배 시인께서 수고해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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