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는 철학을 규정하기를 「철학은 본래 고향을 그리는 아픈 마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참 마음에 와닿는 말이다. 철학이 무슨 거창한 명제가 아니라 철학한다는 것이 결국 고향을 찾는 것이며, 그런 고향을 그리는 아픈 마음을 지닐 때 비로소 우리가 철학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문제는 도대체 우리에게 그런 아픈 마음이 있는가이다. 시멘트 안에 갇혀사는 우리들 중에 누가 아직도 떠난 고향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아파하고 있는지, 아니면 더 이상 아무런 통증을 가지지 않으면서 고향망각, 고향상실증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지? 아예 오늘날 도시에서 사는 문명화된 원숭이들은 묻지도 기억하지도 아파하지도 회상하지도 않은 본래적인 고향궁핍속에 살면서도 광고가 만들어낸 각종 기호들에 중독되어 고향을 망각하고 있다.
철학은 고향을 그리는 아픈 마음이라고 할 때 우리가 물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돌아갈 고향은 어디인가?」이다. 지금 우리가 고향에 와 있는가? 고향을 찾는 아픈 마음이 없으면 고향에 갈수도 없다. 묻는 자만이 가까이 갈 수 있다. 어디에서 고향가는 길을 찾을 수 있는가이다. 기호로 인해 현대는 똑같은 상품 속에서 똑같이 살아간다. 여기에는 들길의 풍경, 고향의 언어, 토속성이 없다. 아파트에서 똑같이 산다. 모든 것이 천편일률적이다. 메타소비속에 산다. 그러므로 아직도 고향이 있을 수 있는지 성찰이 필요한 시대이다.
우리에게 모두 고향이 있다. 그 곳이 어디든지간에, 경주든지 서울이든지 시골이든지 도시든지 모두에게 고향이 있다. 내가 말하는 고향은 장소나 지역, 물리작인 의미가 아니다. 단순한 출생지가 아니라 신토불이로서의 고향이다. 하늘과 땅, 그위에 사는 모든것들의 처소로써, 대지의 힘으로써의 고향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사순절 재의 수요일 날, 흙에 대해서 묵상한다.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운명으로서의 고향이다. 인간성(humanity)도 땅을 의미하는 라틴어 후무스(humus)에서 나왔고 아담(Adam)도 헤브루어로 땅을 뜻하는 「아다마」(adamah)에서 나왔지 않는가. 농촌살리기의 철학적 근거는 바로 고향을 그리는 아픈 마음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그 고향은 바로 땅의 힘으로서의 인간의 근본처소가 아닌가? 땅을 지키는 생산자가 있고, 땅을 그리워하는 도시생활자 여성이 있고, 그리고 이 두 공동체를 연결 짓는 고리가 있는 한 우리 고향은 다시 회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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