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카 수녀님이 벌려 주시는 두 팔 안은 넉넉하고 편안했다.
이곳「프라도의 집」에 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이다.
이곳은 공주 계룡산 계곡아래 농가의 작은 마을, 조립식 수녀원에서 수녀님 세분이 농사를 짓고 산다.
수녀들의 옷차림은 농사꾼 아낙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머리는 간편하게 자르고 흐름한 스웨터와 편안한 바지차림이다. 땅콩, 인삼, 고구마, 감자, 콩 등을 심어 자급자족을 한다. 하루에 만오천원을 품삯으로 받고 남의 집 일도 한다. 모내기나 벼 베기를 비롯해, 하우스에서 딸기, 오이, 토마토를 딸 때도 있다. 겨울에 일이 없거나 공부해야 할 학비가 필요하면 남의 집 파출부 일도 한다.
민들레, 봉숭아, 찔레꽃, 자운영 등 소박한 꽃 이름이 붙은 5개의 방에서 나는 해바라기 방에 들었다. 꽃 이름은 자운영이 좋았지만, 해바라기 방은 기도 방이 붙은 구석진 방이어서 끌렸다.
방안은 이불 한 채와 책상뿐 아무것도 없다. 엘리베이터 안보다 조금 클까 한 방안은 한 사람이 똑 누울만한 공간이다.
저녁에 미역국을 먹으면서 내가 물었다. 「수녀님은 우리나라 음식을 어쩌면 이렇게 맛있게 하셔요?」
프랑스에서 여기 온지 40년이 되었다는 모니카 수녀님의 표정은 그저 아기처럼 천진하면서도 넉넉한 큰 어머니 같다.
성무일도 저녁시간이다. 기도 방에는 예수가 태어났음을 상징하는 석탑 속의 불빛이 차분하다 천상음악과도 같은 수녀님의 목소리가 신이 내린 듯 맑고 곱다. 그기도 속에서 나는 아직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다음날 버스 시간을 기다리는 수녀님을 모셔다 드린다는 핑계로 따라 나섰다. 내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수녀님에게 나도 바람이 쏘이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방문한 노인의 정신은 조금 모자랐다. 한쪽 눈이 사파리인 할머니는 마음이 혼란해 지면 욕지거리도 서슴지 않고, 남의 집에 불을 놓는 것은 예사라고 한다. 그런 노인이 수녀님 앞에서는 한 마리 순한 비둘기 같다.
다 쓰러져 가는 지붕 밑에 꾀죄죄한 이불과 요강, 때 낀 주전자가 을씨년스럽다. 그러나 십자고상과 마리아 상은 먼지한 점 없다. 수녀님이 칭찬을 하자 노인은 순진한 아이처럼 함빡 웃는다. 그 표정이 모처럼 햇살을 본 나팔꽃처럼 애잔하고 환하다. 수녀님은 헝겊주머니에서 양초, 과자, 초콜릿, 설탕을 꺼내 놓는다. 그 손이 무척 아름답다. 수녀님이 유일한 정기적인 방문자이고 보면, 병들어 혼자 있는 노인들에게 그녀는 얼마나 달고 맛있는 한잔의 물일까?
문득 수녀님의 모습에서 사막에서 물을 떠주는 사마리아 여인을 본다.
두 번째 방문한 할머니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맨발로 수녀님을 맞는다. 먹던 점심상을 급히 밀어놓는 노인의 손은 유난히 떨리는 듯하다.
옛날 한옥집이 다 그렇듯이 노인의 방도 아랫목에는 다락방문과 벽장이 있고,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윗방이 있다. 수녀님이 들어서자 얼른 보일러의 온도를 올려놓는다.
「나에게 못되게만 하던 사우(사위)가 어느 날 마음이 빈해(변해) 이 보일러를 놔주었지 뭐유. 하 고마워서… 다 하느님 덕택이지…」
작은 것도 감사하는 노인은 아들, 딸, 자식자랑에 합죽한 입 모양이 연신 바쁘다. 사람이 그리운 탓에 끝없이 흘러 나오는 노인의 말을 들어주는 인내가 필요하건만, 수녀님은 열심히 귀 기울여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준다.
꼬부라진 허리를 간신히 펴 벽장문을 연 노인은 캔 포도 음료를 꺼내놓는다. 그 손이 마른장작개비같다. 당신이 가장 아끼는 것이라며 맛있으니 어서 먹으라고 연신 재촉이다. 수녀님은 끈으로 조인 헝겊주머니를 열어 양초, 과자, 음료, 초콜릿을 또 꺼내 놓는다. 그 모습이 산타같다.
노인의 눈에 금방 이슬이 맺힌다. 먹을 것 보다 사람의 정이 그리운 탓이다.
「나도 수녀님 오시면 줄라구 선물을 하나 준비해 뒀지요」
어린아이처럼 자랑하듯 말하는 할머니의 손에 들린 깨끗한 봉투 하나, 한달 전부터 성경갈피에 준비해둔 세뱃돈이라고 한다. 깜짝 놀라 사양하는 수녀님에게 간절히 받아주기를 청한다. 수녀님은 세금을 내드릴 테니 영수증을 달라고 한다. 이번에는 노인의 손 사례가 완강하다. 수녀님은 그 봉투를 기도서 갈피에 소중히 끼워 넣으며 말씀하신다.
「이것으로 할머니를 위한 미사를 드릴께요」
그 만원권 두 장의 지페속에는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얽힌 혼이 담겨 있는 듯 하다.
수녀님 몫으로 만두를 빚었다며 채반째 내어주는 모정 어린 노인을 바라보던 수녀님은 나는 주는 것이 너무 적은데, 항상 그렇게 크고 많은 것을 받는다며 무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 미소가 거목처럼 겸허해 보인다.
그들은 마치 누군가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있는 이름없는 들꽃 같았다.
새삼 나눌수록 커지는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
나는 왜 받기만 하고 줄 줄을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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