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좋은 선생님으로 살아야지…』
소원이었던 어린이와의 첫 출발은 희망에 찼습니다. 소풍 가는 날 꽁꽁 보리밥에 무우 김치 너덧개 곁들여 싸온 아이들. 볼이 미어져라 신나게 먹는 꿀 맛 같은 점심시간. 복동이가 달려와 내민 것은 꼬깃꼬깃 헌 신문지에 싸온 달걀 두알. 창호지에 콩처럼 굵은 소금 여나무개. 선생님이 되어 처음 받아보는 제자의 선물이라 고맙게 정겨웠습니다.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문화혜택에서 먼 지역, 하숙방에서 호롱불을 밝히며 오늘 하루의 이야기를 적는 기쁨도 이곳만이 느낄 수 있는 정경이었습니다.
발에 때가 다닥다닥 붙은 아이들을 이끌고 학교앞 시냇가로 나왔습니다. 물속의 송사리를 잡고 예쁜 돌을 줍노라면 어느 틈에 발이 퉁퉁 불어 때밀기에 적당했습니다.
『얘들아, 돌자갈로 발의 때를 밀어요』 『와~와~』반 전체 체육시간에 하는 작업이라 여간 신나는게 아니었습니다.
싱싱하게 피어나는 내 인생앞에 이번엔 육체의 병이 아닌 사회의 병폐가 가로막았습니다. 갓 태어난 교단의 병아리 교사에겐 엄청난 폭력이었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팔을 절단할거라는 선고보다 더 강한 결단을 요구했습니다. 암암리에 3ㆍ15부정선거에 협조하라는 상부의 시달이었습니다. 맡은 부락에 가서 삼삼 오오 협조 단원을 구성하여 부정 선거에 협조하라는 지시였으니 교사로서 도저히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나라의 어린 생명을 키우려고 교단에 선 나에게 부형들의 부정에 협조하라니 기가 막혔습니다.
비밀리에 구장을 만나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학교에 와서 복명서를 쓰는 일은 죽음보다 싫은 일이었습니다.
한번은 강요를 받고 먼먼 부락을 찾아 떠났지만 얼굴을 들고 들어 갈 수 없어서 논길을 이리저리 걷고 또 걷다가 몽땅 감기에 걸려버렸습니다. 커텐을 치고 하숙방에 죽은듯 누웠습니다. 이대로 땅속 깊숙이 스며들고만 싶었습니다.
『왜 이 나라가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의 기를 꺽고 있는가?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숱한 육체적 고통을 치르고 냉이꽃처럼 질긴 뿌리 하나로 버티어온 나의 봄을 싹둑 잘라내고 있는가?』
나는 홍역을 앓듯 며칠을 앓았습니다. 급기야 4.19 학생들의 끓는 피는 부정을 규탄했고 동시대를 사는 젊은 세대인 나에겐 죄지은 사람처럼 부끄러움만 안겨다 주었습니다.
『우선 이곳을 떠나자』
어쨌든 우리 학부형들의 얼굴과 아이들을 바라보기가 민망했습니다.
감사하게도 황산의 학교가 나의 두 번재 발령지였습니다. 가까운 읍에 의사형부가 병원을 차려서 그곳에서 통근하게 되었습니다. 내 팔을 수술해주신 형부는 장로가 되었습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풍금도 쳐주고 기도생활을 해야지, 넌 매일 책만 보고… 어쩔 셈이냐?』
언니의 충고가 날라왔습니다.
언니따라 교회에 가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웬지 선뜻 응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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