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튼 나는 내가 설땅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나의 방황은 우선 학교라도 진학하는 것이였습니다. 보일듯 잡힐듯 하며 사라지는 빛에로의 끝없는 나의 여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아무튼 나는 이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교사가 공무원이기에 정의가 아닌 일을 감수한다면 장차 이 나라는 어찌 될것이며 무슨 낯으로 아이들 앞에 당당히 설것입니까? 동료교사들은 나의 고민을 웃었습니다. 「아직 병아리 교사라 운명적인 강풍을 견디지 못한다고 거부할수 있는 위치가 부럽다, 부양할 가족이 없으니 그런 고민도 고민이라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가져야 안정이 된다」고 언니는 결혼자리를 혼자 알아보곤 했습니다.
주님의 품속으로
김제천주교회에 처음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선생님이 하시는대로 장궤를 하고 오른손을 따라 이마와 가슴과 양쪽 어깨에 손으로 십자를 그었습니다. 어색하고 누가 나만 쳐다보는것 같아 쑥스러웠습니다. 교회마루바닥에 앉은것은 14살때 집앞 개척교회에 울기위해 간 이후 처음이었으니 8년만이었습니다.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그때는 울러 갔었고 지금은 사표를 내고 떠나야 하는 나의 갈길을 밝혀주시길 기원하는 매달림이었습니다. 시골이라 그런지 젊은이들은 적고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평화스럽고 행복해 보였으니 무엇이 그들을 기쁨에 넘치게 하는지 신비스러웠습니다.
이선생님은 구경온 나에게 자기의 미사보를 머리위에 씌어주었습니다. 갑자기 좌우의 시선이 차단되고 앞으로 눈이 쏠렸습니다.
「하느님-」그 한마디로 족했습니다.
「난 떠나야 해요. 도와 주세요. 나의 갈길을 아직 찾지못하고 방황하고 있어요. 제발」
그해 사표를 냈고 상경했습니다. 서울역엔 친구 경옥이가 마중을 나왔고 초급대학 국문과에 입학을 하여 즐거운 학창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드디어 이곳에서 장차 나의 갈길을 구체적으로 시사해주셨으니 그곳에서 만난 친구 정식의 등장이었습니다. 자취하느라 늦게 등교하면 자리를 맡아주거나 강의 노트를 빌려주곤 해서 서울 생활이 익숙해졌습니다. 대학1학년때 집에 내려와 교리공부를 시작해서 1963년 2월 12일 율리아라는 이름으로 범신부님께 영세를 받았습니다. 개신교에 다니는 언니는 환영을 하면서도「천주교신자가 되면 신자하고만 결혼해야 된다」며 걱정을 했고「처제가 나중에 수녀가 된다고 할까 걱정이요」하시는 장로형부의 축하도 받으면서 이 방학을 놓칠세라 영세를 받았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건강은 나빴지만 아흔 아홉마리 양보다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는 참 목자로서 당신의 몸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습니까?」
「믿습니다」
신앙고백을 할때 음성이 떨려나왔고 이마에 물을 부어 세례를 줄 때 신부님의「나는 성부와 성자의 성신의 이름으로 온 율리아에게 세례를 줍니다」하는 감격스런 대목에서 환희의 눈물이 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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