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6일 및 7일 명동대성당에 대한 정부의 공권력 투입 및 성당내 경찰폭력 사태는 그와 유사한 사건이 저 칠흑 같던 유신시절에도 또 제5공화국시절이나 제6공화국 시절에도 결코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6월 16일 국무총리 담화에서 주장했던 이른바 「불가피한 조치」가 전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의 충격과 분노는 너무나 컸다.
이번 사건은 상식적 차원에서 따져 보면 전혀 일어나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일어날 필요도 없었던 일이었다. 주지되듯이 지난 5월 22일 한국통신 노동조합 집행부가 성당측 의사와는 무관하게 명동대성당을 그들의 피난처로 택했고 성당 측은 무한한 인내와 사랑으로 이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거듭해서 마침내 노조측의 양보를 이끌어 내고 대화의 국면에 다달았던 때였다. 바로 이즈음 정부는 마치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시샘하듯 물리력을 앞세워 한국민주화의 성지(聖地)이자 우리 사회의 마지막 양심의 보루를 유린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세상에 이처럼 어리석고 무모하고 안타까운 일이 있을가. 이로써 이른바 문민정부는 권력의 교만과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권은「모태를 유린한 권력」(김수환 추기경 특별강론)이라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자초한 것이다.
사태의 진전을 보면서 우리는 그간 이른바 문민정부가「문민」이라는 이름과 그에 따른「정당성」의 프리미엄을 앞세워 국민이 믿고 맡긴 권력을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에 경악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통신사태를 한마디로「국가전복기도」로 규정하는 데서 시작하여「법 앞에 성역은 없다」로 그리고 마침내「불가피한 조치」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보여 준 사유의 경직성과 대화의 단절 그리고 일관된 힘의 논리는 현정부의 민주적 도덕적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시 상황을 되돌아 보자. 우선 우리 교회는 한번도 명동대성당을「성역」이라고 선언한 일도 규정한 일도 없다. 그리고 구태여 따지자면 정부와 교회가 정의하는 성역의 의미는 같지 않다.
정부는 그것을「치외법권지대」라고 인식하는데 반해, 교회는 그것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가꾸는 최후의 보루로 그리고 외로운 영혼의 피난처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랜 군부 권위주의시대를 거치면서 명동성당을 유서 깊은 민주화의 성소로 그리고 이 사회에서 핍박 받는 많은 이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그 성당을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동참하였을 지언정 일방적으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편파적으로 그들 편으로 기울어지지는 않았다. 이번 한통사태의 경우도 교회는 공정한 중재자로서 노사간에 화해와 대화를 촉구하였고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오히려 교회는 더불어 사는 우리 사회를 양심법과 공동선의 정신에 따라 도덕적으로 감화하는데 진력해 온 것이다. 그런 교회가 졸지에 정부와 일반 언론에 의해 정부의 정당한 공권력 행사를 무력화하는「치외법권지대」로 매도되고 끝내는 힘에 의해 유린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현정부의 도덕적 불감증과 권력의 교만 때문이라고 본다. 우선 극히 걱정스러운 점은 권력의 최고 위 수준에 도덕적 여과장치가 결여되어 있다는 인식이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정부담화 속에서는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회개의 빛이 없고 오히려 형식적인 유감의 피력과 변명으로 상황을 호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담화문 뒷부분에서는 「종교계에서도…」「치외법권지대」나「불법투쟁의 안전지대」로 잘못 인식되는 일이 없도록 」운운하며 경고조의 여운까지 남기고 있는 데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담화문 속에 정부의 고뇌의 흔적이 없다는 것은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 사회에서 정부의 공적 권위가 바로 세워지지 못하고 물리적 힘이 자주 투입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른바 문민정부의 도덕적 정당성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현정부는 교회에 대해「성역이 없다」고 강압적 공세를 일삼으면서 실제로 그 동안 자신의 힘을 축적하고 사회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적지 않은「성역」을 쌓아왔다. 따지고 보면 현정권의 모태인「3당 통합」자체가 빗나간 궤적의 시작이었다고 본다. 노사문제가 계속 공전하고 있는 큰 이유의 하나도 민주화 시대의 한가운데서 70ㆍ80년대식의 노동통제정책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는 정부의 무정견한 입장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정권과 더불어 우리를 크게 실망시킨 것은 우리 나라 언론의 현주소이다. 공권력 투입 며칠 전부터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주요 언론 매체가 상투적인 논리로 차례로「성역은 없다」을 합창하더니 난입사태 이후에도 왜곡 및 축소보도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공권력 투입이 선거열기에 묻혀버린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명동성당사태에 관해 언론의 편파적 보도로 진실이 가려졌고 사회적 인식이 오도되었다. 그래서 마치 교회가「성역」을 선포하고 노조 편에서 공권력과 맞서기나 한 것처럼 잘못 인식되기도 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과연 언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천주교 서울대교구시국대책위원회의「시국기도회를 마치며」가 나왔다. 교회의 올바른 지적에 대해 더 이상의 뉘우침이 없는 현정부와 편파적 왜곡보도로 일관한 언론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하고 정부담화를 결코 수용할 수 없음을 명백히 밝히면서 다가 올 지방자치선거와 남북문제 등 시급한 국가적 현안을 앞에 두고 국민적 화해와 일치를 위해 차후 행동을 유보하고 시국기도회를 마치겠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필자는 명동성당사태를 두고 현정부에게 계속 참회를 촉구하고 더 높은 수준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그리 슬기로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정부의 작금의 도덕적 수준으로 보아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무모할 뿐더러 성사 될 가능성이 없고 자칫 교회의 자존심이 훼손된데 대한 공세적 대응으로 오해되거나 선거철에 정쟁에 휘말릴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앞으로 현 정권을 비롯해 정치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땅에 떨어진 우리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도덕성을 높이는데 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이를 바르게 세우는데 배전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의 민주발전을 위해 시금석이 될 지자제선거가 성공적으로 자리잡는데 관심을 일깨우고 위험수위를 넘어가는 지방할거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를 경고하고 민주사회 내에「성역」을 없애는 일과 무엇보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해 정부와 언론이 바른 구실을 할 수 있도록 감시하고 촉구하는 일에 그리고 참된 민족화해와 통일을 지향하는데 가일층의 노력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정권에 대한 항거를 넘어 우리 자신의 참회를 포함하여 우리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도덕성을 높이는데 함께 동참해야 될 시기라고 본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시국기도회를 마치면서 그 뜻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가톨릭공동체가 우리사회의 정치적 도덕성회복을 위한 구국기도회를 시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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