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에 대한 기대를 한낱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명동대성당과 조계사에 공권력을 투입, 성역을 침탈한 데 대해 정부의 공개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요청했던 교회로서는 6월 16일의 정부성명에 실망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정부가 성역에 공권력을 투입한 사실자체에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또 재발 방지도 약속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정부는 자기변명과 엄포성 발언으로 교회나 사찰이「치외법권지대」니「불법투쟁의 안전지대」로 인식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이러한 정부의 입장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고자 한다.
그 첫째는 현 정부가 허울은「문민」을 뒤집어 썼지만 내막은 과거 군사정권이나 독선적 권위주의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자신이 태어난 모태를 무참히 짓밟고도 잘못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주변에서 그토록 귀따갑게 조언과 충고를 해줘도 받아들일 자세가 전혀 안돼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교회가 더 이상「성역」을 주장하지 말라는 발언은 너무나 현 정부의 무지와 오만불손을 적나라하게 노정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부터 수천 년에 이르도록, 또한 2천년 교회역사에서, 그리고 한국에서는 군사독재 정권도 감히 침탈하지 못한 교회의 성역을 포기하라는 말은「문맹」이 아니고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곧 권불십년(權不十年)의 현세정권이 무한한 종교성역을 힘으로 제압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참으로 어리석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따라서 현 정권이 성역을 인정하던 않던, 교회는 그 역사와 전통과 관례에 따라 성역을 보존하고 수호할 수 밖에 없음을 거듭 밝혀둔다. 지난날 실정법과 교회법이 충돌했을 때 교회는 그 어떤 시련도 주저하지 않고 교회를 수호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번 명동사태에 전국 모든 교구 사제단 신자들이 일심동체가 돼 단식과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은 신앙을 위해서는 순교까지 할 각오가 돼 있음을 극명히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세 번째로 현 정부는「문민」이라는 착각과 아집에서 벗어나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진단해 볼 것을 충고한다. 그것은 어느 시대나 성역이 필요했던 것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약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 약자들은 대개 정권이나 제도의 희생물들로서 지금도 그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정부의 무성의하고 무례한 답변에도 불구, 서울대교구 사제평의회와 대책위가 며칠 앞둔 지자제 선거나 남북문제 등 시급한 국가적 현안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 차후 행동을 유보하고 20일로 기도회를 일단 마치기로 한 것은 참으로 교회다운 용단이 아닐 수 없다.
정부는 이러한 교회의 진의를 악용하거나 호도함이 없이 잘 받아들여 참으로 겸손하고 정직한 문민정부로서 새로이 태어나기를 거듭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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