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교회에 기대어 숨을 쉬었던 적이 있었다. 불과 10년 아니 5년 여전까지 언론은 자력으로 큰소리 한번 내기가 무지무지하게 어려웠다. 60년대부터 계산해보면 우리 언론은 무려 20년이 넘도록 교회라는 큰 나무를 그늘로 삼았다. 철권정치 강압정치라는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 언론은 교회가 내는 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감추어 실었었다.
우리는 당시 언론이 한결같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정치, 경제 심지어 사회문화분야에 이르기까지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자기 스스로 내는 목소리가 별로 없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제도언론」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고 독자나 시청자는 신문이든 방송이든 하나만 선택하면 족했다. 무개성의 언론은 이른바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변화의 소리를 가지기 시작했다. 언론에도 개성시대가 도래한 셈이었다. 자기 목소리를 가진 언론의 변화는 문민정부 출범의 뚜렷한 상표와도 같았다. 그 언론이 명동사건을 놓고 거의 같은 목소리를 되찾았다(?). 언론들은 정부의 명동성당 공권력 난입을「법 앞에 성역 없다」는 논리로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이다.
언론들이 제기한 문제의「성역」은 과거 교회에 기대어 숨쉬었던 언론들이 붙여준 명동성당의 고유명사였다. 이미 교회가 여러 차례 밝히고 있듯 명동은 교회가 선포한 것이 아니라 암울한 시대가 만들어낸 우리 국민 모두의 성역이었다. 그 성역은 법 앞에 자신의 특권을 스스로 내세운 적도 주장한 적이 없음은 물론이었다. 언론은 자신들이 앞장서 의미를 부여해준 명동성당의 고유 역할을 너무나 쉽게 잊어먹어 버린 것이다.
불과 5년여 사이 명동성당의 고유한 그리고 고귀한 위치를 깡그리 잊어먹은 언론은 그 망각으로 여론을 호도하는데 앞장섰다. 어느 시대 어떤 상황하에서도 필요한 사람들의 피난처, 언론은 그 피난처를 특권요구 라는 이름으로 매도해 버렸다. 참으로 슬픈 언론의 망각이 아닐 수 없다.
명동사태는 정부 역시 중요한 사실을 잊어 먹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11일 김수환 추기경은 미사 강론에서「현정부가 10년 전 6월 10일 명동에서 촉발된 민주화 항쟁을 모태로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억압정권하에서도 지켜져 온 성역으로서의 명동, 그 명동이 있었기에 어쩌면 문민정부의 탄생이 가능했다는 지적은 현 정부가 누구보다도 숙지하고 있어야 할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명동성당에 긴박한 이유 없이 공권력을 난입시켜 폭력을 자행함으로서 자신의 모태를 스스로 유린하고 말았다.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정부의 두 번째 망각은 오늘 우리 사회에는 성역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국민들은 신한국 건설과 한국병치유를 내세우며 성역 없는 사정을 천명해 온 현정부 주변에 많은 성역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언론을 앞세워 법 앞에 성역이 없다고 선포한 정부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랫동안 화해와 중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자리가 되어 온 명동성당의 역사적 전동과 법 이상의 가치를 공권력으로 짓밟는 정부가 어떻게 법 앞에 성역이 없다는 선언을 남발할 수가 있는지 그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정부가 잊어먹고 있는 세 번째 사실은 문민정부란 이름으로 스스로 자행하고 있는 공권력 남용이다. 출범과 더불어 강력한 도덕정치를 내세운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강조해왔고 국민들은 박수와 격려로 정부의 선택에 힘을 보태주었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가 보아 온 것은 빈발하는 대형사고와 이에 대처하는 최고 통수권자의 최후통첩남발이 계속 되었다는 사실뿐이었다. 도덕정치, 깨끗한 정부를 내걸었던 정부는 불과 몇년사이 국민을 상대로 사과와 강경대처 발언을 반복하면서「사과정부」「문민독재정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깨끗한 정부가 되기 위해 도덕적인 정부가 되기 위해 정부는 대화와 타협, 화해와 조정 보다는 공권력 남용을 선택해온 것이다.
정부의 공권력 남용은 명동성당 난입에서 극치를 이루고 있다. 대화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중재가 이루어지는 길목에서 선택한 정부의 공권력은 바로 여기서 설득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명동사태는 우리 교회 스스로에게도 몇 가지 반성과 의무를 촉구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일상을 통해 소외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자신을 내어 주어 왔는가. 명동이라는 특수지역 외에서 내 삶 전체를 통해서 교회답게 그리스도 인답게 자신을 봉헌하고 있는가.
진정 모든 이에게 열린 교회로 자신을 새롭게 무장해야 할 사실과 더불어 명동사태는 우리 모두에게 언론에 의해 호도된 인식을 바로 잡아 나가는 일을 의무로 남겨주었다. 그것은 언론에 의해 정부의 공권력 남용에도 도덕적 의미에서의 성역 그 높은 가치를 우리 국민 모두와 함께 다시는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우리 자신을 다지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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