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님께서 사다주신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윗몸을 일으키면 창밖을 내다볼 수가 있었기에 어느날 부터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을 불러세워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는 핑계로 수면제를 한두알씩 사서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때만해도 수면제가 어느정도의 양이 되면 치사량이 될 수도 있었기에 거의 한웅큼이 넘는 약이 모아졌을때 나는 미련없이 그 약을 입안에 털어넣고 말았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는 나날을 그렇게라도 마감하고 싶었다. 그 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암담하고 끔찍하여 그 방법을 택하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명의 재천」이라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데려가지 않으셨다. 아마도 아직도 내가 세상에서 꼭 필요하게 쓰실곳이 있으셨는지 사흘만에 진한 소독약 냄새속에 아스라이 어머님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긴긴 잠에 깨어나고 말았다. 사흘 밤낮을 식음을 전폐하시고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울부짖었을 어머님의 몰골은 차라리 저승의 문턱까지 갔다온 내 모습보다 더 처참하였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입원실로 옯겨진 내 병실을 자주 방문하던 견습 간호사가 있었다. 유난히 앳되 보이고 착실하던 그 간호사가 어느날 저녁식사를 끝낸후에 소형 녹음기를 들고서 병실을 찾아왔다.
『이것 한번 들어 보세요. 꽤 좋은 프로예요, 내일 아침에 돌려주세요』라며 틀어 주고 간 그 녹음기에서는 「내일은 푸른하늘」이라는 장애인들이 꾸미는 이야기들이 흘러 나오고 있었는데 어느 쬐그만 아가씨가 투고한 듯한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었다.
『나는 19세에 뇌수술 후유증으로 반신불수가 되었지만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수 많은 장애인들이 살아가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나보다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하여 헌신하며 밟히면 밟힐수록 더욱더 강해지는 보리처럼 더 푸른 앞날을 설계하며 살아 가렵니다』
나는 커다란 쇠망치로 뒤통수를 한대 거세게 얻어 맞은 사람처럼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날밤 나는 그 방송을 듣고 또 듣고 또 들었다. 그녀는 나에게 「그 까짓 두다리를 못쓰게 되었다고 약까지 먹고 죽으려는 바보가 어딨느냐. 너에게 아직까지 성한 두 팔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질책하고 있었다. 나의 나약함을 비웃고 있었다.
새벽 여명이 뿌옇게 밝아올 때 나는 나의 소심함과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편지를 부치고 일주일쯤 지나서 나는 퇴원을 하였고 집으로 배달된 그녀의 답장을 받을 수가 있었다. 「차라리 태어 날 때 부터 장애인이었던 사람보다 중도에 장애라는 굴레를 쓴 사람의 아픔은 더욱 크고 아프고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 이기는 하지만 그동안만이라도 성한몸으로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자」는 그녀의 충고어린 부탁에 이미 내 마음은 푸근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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