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가 높으신 연도회원들은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시신을 씻어주시고 입관시키는 모든 예절을 손수 다 해 주셨고 빈소를 비우지 않고, 이틀 밤낮을 교대로 쉬지 않고 연도를 해 주시는 것이었다.
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햇병아리 신자였던 나는 그분들이 내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보내드리는 그 예절을 상제인 우리보다 더 간절히 하느님께 간구하며 그 영혼을 거두어 달라고 매달리시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앙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라고 느끼며 나는 처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눈으로 확인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내게 또 하나의 현실로 다가선 어려움은 아버지의 유택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서울에는 교적이 없어 성당묘지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내 청량리성당 주임신부님이 나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셨던지 『집안에 누구 영세한 사람 없습니까?』하고 물으시곤 영세 증명서를 띄어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하느님의 깊은 사랑과 오묘하신 섭리를 알아 들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한알의 밀알이 되신것이다.
슬픔이 조금씩 내안에서 밀려나고 학교일에 익숙하게 된 나는 내 교만한 눈에 비친, 안일하고 나태하게 시간이나 슬슬 때우며 봉급을 받는 나이드신 선배선생님들이 무능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의 중요한 수업, 환경정리 등 모든 일에 늘 두각을 나타낸다는 교장성생님의 칭찬의 말씀은 내안에 있는 교만이라는 나무에 생명수를 부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조금씩 고개를 빳빳이 들고 목소리가 커지며 안하무인격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추위가 한풀 꺾인 어느날 하숙집에 손님이 찾아 오셨다. 그분은 공소회장님이셨다. 회장님 말씀이 조암에 사제관을 지어 신부님을 모셔 왔고 또 익명으로 올겐도 기증 받았는데 올겐을 칠 사람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도 몰랐고 신부님이 오신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부끄러워 할 말을 잃었다. 겨우 국민학교 아이들이나 가르칠 수 있는 내 능력이지만 도와드리기로 약속하고 기쁜마음으로 돌아가시는 회장님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주일 아침은 더 이상 한가롭게 늦잠을 잘 수 있는 날이 아니었다. 평일보다 더 일찍 일어나야 했고 15리 길을 재수가 좋으면 경운기나 소달구지를 얻어 타고 아니면 걸어서 성당까지 가야했다. 성당이래야 사제관 2층에 40∼50명이 겨우 앉을 수 있는 곳이었다. 기도서나 성가책을 가진 사람이 몇 명 안되었고 미사예절도 모두 서툴렀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은 무한하시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그분의 솜씨를 우리 가운데 늘 나타내 주시었다. 신부님은 성가 목록을 손수 만드시어 미사 시작 15분전에 나와 함께 신자들에게 성가를 가르치셨다.
기도하며 노력하시는 신부님의 열성에 신자들도 조금씩 그 모양새가 갖추어져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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