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3년상을 벗은 1972년 10월의 일이다. 아직도 추수가 한창이고 보기 좋게 펼쳐진 황금의 들판이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어느날, 저녁상을 막 물리고 한가롭게 따뜻한 아랫목에서 책을 뒤적이고 있는데 나를 찾는 청부아저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나의 평화를 깨뜨리고 말았다.
「어머니 위독 급상경 성바오로병원」이란 전문을 내 손에 쥐어 주고는 그만 미안해 하는 청부아저씨의 얼굴이 가물 멀어지는 듯 나는 그만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나는 성바오로병원 응급실까지 어떻게 갔는지 지금도 기억이 없다. 약냄새가 짙게 풍기는 그곳에 산소 호흡기를 낀채 눈을 감고 계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슬픔보다 어느새 내가 감당해야 할 이 고통의 수렁에서부터 도망치고 싶은 이기심이 꿈틀대고 있었다.
나는 담당의사를 만났고 시원한 대답을 못들은 상태에서 우선 입원비가 싼 동부시립병원으로 어머니를 옮겼다. 나는 사흘밤을 병원에서 어머니를 지켜보며 소생할 희망이 없어보이는 어머니를 하느님께서 빨리 데려가시라고 기도했다. 결국 나는 내 이기심의 포로가 되었고 그래서 무섭고 두려운 고통의 짐을 빨리 벗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어린 두동생을 생각하니 슬퍼하는 것도 사치인 것 같았다. 남동생 바오로는 대학을 가기 위해 재수하며 제기동성당에 성가대 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여동생 로사는 이제 중학교2학년이었다. 어머니는 바오로가 모셔온 본당신부님께 종부성사를 받으셨고 혼수상태에서 많은 교우들의 병문안도 받으셨다. 그러나 거친 호흡만 거듭하시며 조금도 호전되는 기색이 없는 어머니의 모습은 죽음 그 자체였다.
나는 57살이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삶을 사시는 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지혜롭게 견디신 어머니를 누구보다 존경하며 사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사시면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하실 수 있는, 자식을 갖은 부모로서의 기쁨도 맛볼 수 있는, 자식을 갖은 부모로서의 기쁨도 맛볼 수 있는 시간을 이렇게 그냥 놓쳐 버릴 것 같은 안타까움에 내 가슴은 조각이 나는 듯 아팠다.
입원하신지 나흘째 되던 날 오후, 어머니는 깊은 회한의 숨을 한번 쉬시고는 눈한번 못떠보시고 그렇게 우리가슴에 아픔을 남겨 놓으시고 가셨다. 어머니의 가슴속엔 무엇인가 나에게 하시고 싶었던 말씀이 많으셨을텐데 모든 것을 가슴에 묻고 그렇게 가셨다.
이렇게 나흘동안 나는 지옥을 헤매는 듯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늘 내가 숨쉬고 살아갈 수 있게 나를 돌보셨다. 그때 마침 학교는 농번기 휴가가 시작되었고 교장선생님은 학교 전직원을 데리고 어머니 장례를 도와주시러 오신 것이다. 아버지의 유택은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합장을 하려면 한참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내가 무시하고 늘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 무능한 선생님들이 서슴없이 어머니의 관을 번쩍 들고 앞장서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한 마음과 부끄러움이 한데 어울려 뜨거운 눈물로 흘러 내렸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