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을지로에서 명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사람들은 붉은색 십자가가 그려진 위장을 들고 서 있는「어떤 사람」을 볼 수가 있다. 흰색도포를 휘날리듯 입은 그는 얼굴을 온통 가린 수염 등으로 인해 마치「도사」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에겐 오직 비오는 날이나 눈오는 날이나 바람부는 날 등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1년3백65일중에 그가 자기의「특별자리」를 비우는 날은 며칠 되지 않는 것 같다고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의 이「서있음」을 눈여겨 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처음 대면하는 사람들의 경우 호기심이 들기도 하겠지만「온갖 별일」을 자주 겪는 한국사람들로선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에 별로 투자를 하지 않는 것 같다. 따라서 그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가 바라는 것만큼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 같지도 않다.
십자가가 그려진 휘장을 들고 서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는「그리스도」인 것이 분명하다. 가끔씩이지만 그의 입에선「회개하지 않으면 지옥불을 면치 못하리라」는 외침도 나오곤 한다. 당당하고 또 지속적인 그의 행동을 보면 그의 믿음이 그를 세상밖으로 내 보낸 것이 분명한 듯 하다. 그러나 그토록 엄청난 열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그의 믿음속에 동화시키기엔 웬지 역부족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곳곳에서는 여러가지 형태의「선견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를 본 사람, 성모를 본 사람, 그분들이 메시지를 전해 들은 사람, 또한 그분들을 연상시키는 그 어떤 형상들을 본 사람 등등, 그와 같은 일련의 사안들은 최근 우리 한국에서도 빈발하고 있다.
우리 신자들 가운데는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말하는 일련의 사안들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다. 직접 체험하고 느끼고 눈으로 확인했다는 사람들은 물론이려니와 그 사실을 전해듣기만 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확신을 가지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 교회가 어떤 사실을 특별한 현상, 즉「기적」으로 받아들이기 까지는 엄청나게 복잡한 절차와 과정이 필요하다. 어떤 경우 1백년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된 적도 있었다. 수많은「가짜 기적」속에서「진짜 기적」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까다로운 검사와 검증이 요구되고 그것은 정말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최근의 여러 현상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교회의 이 까다로운 과정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정작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일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련이「특별한 상황」들을 믿는다면 그것이 나쁠 것은 없다. 그 내용이란 것이 대개는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질타하고 잘 믿고 또 회개해야 한다는 등 믿는 이로서 반드시 필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현상들을 통해 그 믿음이 더욱 강화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결코 탓할 일이 못될 것이다.
만일 그 현상들을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나쁠 것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선택하실 때부터, 우리가 그분의 품안으로 들어설 때부터 우리는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을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이야말로 진복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피해야 할 것은 그 같은 현상들을 현상 그 자체로 만족하고자 하는 일이다. 요즘같이 모든 것이 허(虛)하기만 한 세상에 자칫 이 같은 현상들을 자기 믿음의 전부인양 착각하는 일은 정말 우리가 경계하고 피해야만 할 일이다. 『그 같은 현상을 믿는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고 믿지 않는다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설파한 한 목자의 말씀이 새삼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나 오늘 전교주일을 맞으면서, 특별히 신자증가율이 예전만 못하다는 호들갑스러운 진단을 접하면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신자스러움을 찾는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내가 참 그리스도인처럼 산다면 그것보다 강렬한「전교」는 없을 것이다.
신앙인인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을 확인하기 위해 아직도 연연해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신앙인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믿는 그리스도를 이웃과 나누는 일이다. 입으로써만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 내 친절을 통해, 내 진심을 통해 이웃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일이다. 내가「한번 더 웃는 것」이 전교에는 필요한 약임을 우리 모두 깨달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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