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25년의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었을 그 아이들 중에 신자가 많이 나왔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부님은 그곳에 성당을 지으시려고 동분서주했다. 한 사제가 하느님의 성전을 지어 봉헌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십자가를 지셔야 되시는지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인간의 힘이 아닌 오직 하느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 쌀이 없어 점심을 못 가지고 오는 아이가 절반이 넘는 이 가난한 마을에 교우들이 약정한 약정금(주로 쌀가마로 헤아림)을 거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교우들이 교대로 하는 노력봉사도 농번기때는 중단되어야 했다. 신부님은 손수 한여름 뙤약볕에 벽돌을 지어 나르시고 망치로 자갈을 깨다 손도 수없이 짓지으시며 순수하시던 신부님의 모습은 어느새 막노동자의 모습으로 변하신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힘들어 하신 것은 돈 걱정이셨다. 그러나 이런 모든 피와 땀의 결실이 훌륭한 성전으로 변화되어 우리 앞에 웅장하게 우뚝 섰을 때 그 누구도 하느님의 무한하신 힘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나는 새 성당에서 첫 성탄을 보내며 휑하니 높은 천장에 오직 십자가상에 예수님만이 계신 그곳에 내 대모인 김선생과 함께 우리 손으로 성탄 구유를 만들어다 모셔 놓았다. 헌신문지와 풀로 종이찰흙을 만들고 그것으로 아기 예수님, 동방박사, 성모님, 요셉성인 등을 만들고 사과괴짝에 벼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었다. 그것을 보고 기뻐하시던 신부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어느새 나는 혼기가 지난 나이가 되었고 주위에선 결혼이라는 사치스러운 단어를 자구 상기 시켜 주었다. 처녀 때는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본다는 수녀원을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찬성해 주실 줄 믿었던 김신부님의 결사 반대는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그것도 또한 나의 이기심이라는 것이다.
신부님은 나를 결혼시키려고 애쓰셨고 나는 드디어 종교가 없는 집안에 6남매 중 맏이인 남편에게 시집오기까지 신부님은 남편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던 것이다. 남편은 신부님의 주례로 왕십리본당에서 혼배미사를 드리러 석천학교 교장선생님의 손을 잡고 성당으로 걸어 들어가는 내 마음은 앙금처럼 가라 앉았던 서러움이 눈물이 되어 내 하얀 웨딩드레스를 소리 없이 적셨다.
나는 7년동안 정들었던 조암을 떠나 성남시로 발령을 받았고 새로운 삶이 낯선 시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느님은 내 부모를 일찍 거두어 간 대신에 내게 좋으신 시부모님을 주셨다. 딸 윤희와 아들 학빈이를 낳으면서 하느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이 많은 축복을 어찌 다 감사할지 몰랐다.
유난히도 춥고 눈이 많이 오던 1979년 1월 23일. 30여년동안 내가 나서 자란 내 부모가 묻힌 조국을 두고 얼굴 모양새와 언어, 그리고 생활풍습이 낯선 땅, 미국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이민 보따리를 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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