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 친구, 제자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조용히 지켜보고 계시던 한신부님이 내 손에 살며시 쥐어 주신 신부님의 체취가 배인 나무묵주를 내 인생에 동아줄 인양 꼭 움켜주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그저 침묵하고 터져 버린 것이다. 목이 메이신 신부님이나 눈물 범벅이 된 나, 우리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단1분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내 마음과는 달리 시간은 사정없이 흘렀고 이별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나는 두살짜리 학빈이를 안고 세살짜리 윤희의 손을 이끌며 터미널로 들어가야 했다.
18시간의 여행 끝에 일본과 시카고를 거쳐 마침내 뉴욕 케네디 공항의 상공을 나를 때 뉴욕시가의 야경은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이민가방을 끌고 아이들을 안고 업고 초췌해진 모습으로 공항을 빠져 나오니 낯익은 얼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의 외로운 이방인의 생활은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우리 네식구는 큰 시누님 댁에서 아파트를 얻을 수 있는 돈을 마련할 때까지 함께 살아야 했다. 1백년은 족히 되었을 듯싶은 시누님네 아파트에 들어서니 길에서 주워다 놓았다는 허름한 가구와 색바랜 페인트가 마치 영화에서 본 빈민굴의 한 장면을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뉴욕에 도착한지 1주일이 되던 날 남편은 보석 깎는 공장에 취직이 되었고 나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셋째 시누이의 네일 가게에 일하러 나가야 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손님의 발바닥의 굳은 살을 돌로 문질러 부드럽게 해주고 발톱을 다듬어 색깔을 발라주는 일이었다. 두번째날, 내가 처음 받은 이란계 유태인의 발을 닦으며 내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내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밭에서 나는 무섭도록 지독한 냄새와 국수같이 밀려나오는 때는 내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게 하였다. 한마디의 말도 알아 듣지 못하는 나에게 요기조기를 가리키며 불평을 시작하니 내 손의 떨리고 눈물은 왜 그렇게 흔한지…, 그때 내 머리속엔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도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셨는데 하물며 나 같은 죄인이 무엇을 못하겠는가?」
나는 살아남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일을 했다.
뉴욕의 2월은 야속하게도 추웠다. 내 마음이 추워서 그런지 눈보라와 겨울비는 가난한 내 마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일을 마치고 시어머님한테서 학빈이를 데리고 나와 지하철을 타고 10정류장을 와서 내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차가운 겨울비였다.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 나는 아이에게 내 머플러를 씌우고 9블록이나 되는 집을 향해 유모차를 밀며 빗속으로 뛰었다. 쏟아지는 비를 한 점 피하지 못하고 빗물이 옷속으로 스며들며 머리에 흘러 내리는 빗물은 어느새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로 변했다. 물을 잔뜩 먹은 내 오바는 천근같이 무거워 더는 뛸 수가 없었고 어린 학빈이는 얼굴을 두들기는 빗줄기를 피하려고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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