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음악회에서 등대지기와 애모를 부르셨던 추기경님의 소박한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그분의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 감동은 그저 연출이나 제스처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 감동에서 권위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감히 추기경님이 어찌 그런 노래를 부르시다니? 그러나 권위주의와 권위는 다르다. 평신도의 연수회에도 그렇고 수녀님들의 모임에서도 자주 지적되는 공통적으로 나온 문제점은 사제의 독선적 권위주의이다. 사실 독선적 권위주의는 복음화의 걸림돌임에 틀림이 없다.
아마도 나 역시 나도 모르게 남성성직자로서 몸에 이미 배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사제의 권위주의는 결코 한 순간에 생긴 것은 아니다. 가부장제인 우리의 역사적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신도의 수용주의는 어떤가. 평신도의 입장에서는 신부님이 권위적이니까 교회가 이 모양이라고 신부님을 탓한다. 반대로 신부의 입장에서는 자유를 주어도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고 평신도를 탓한다. 서로 떠넘기기 악순환은 이제 끊어 버리자. 수동주의가 있는 곳에 독재가 있고 독재가 있는 곳에 수동주의가 있다.
둘 다 끊어 버리자. 이 독선적 권위주의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것처럼 자주적 참여나 통합 구조를 만들기 위한 소공동체의 성당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안은 있는가? 바로 우리의 소공동체이다. 지금의 반 모임을 그리고 본당을 소공동체로 전환해야 한다. 본당이 클수록 통합의 구조를 만들기 위한 소공동체의 육성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2천년대 복음화 계획의 방향과 일치한다.
본당이나 사람의 권위는 우리를 하나로 느끼게 하는 뜻이나 틀이라고 보고 싶다. 진정한 뜻으로 참여하고 통합하는 것이 권위가 아니던가. 이것은 억지가 아니라 시키는 대로가 아니라 의사결정과정에서부터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사 구조나 통합구조를 만들어 나갈 때 독선주의도 수동주의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골이 깊게 패인 세대간의 단절도 이러한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과연 지금의 평협이나 사목협의회가 본당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가이다. 해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신심 단체 육성만으로 본당을 키울 수가 없다고 본다. 본당 구조의 전면 개혁이 요구된다. 과연 구역, 반 공동체를 교회로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면 교계제도가 아닌 평신도 봉사자에 의한 교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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