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사이 엄청난 변화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절대절명의 권한도 한낮 물거품임을, 부귀와 영화도 부질없는 춘몽(春夢)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다. 노씨 사건이 주는 충격의 파장은 국민 모두에까지 번져 국민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자로 잴수 없는 극한 상황에 까지 이르고 있다.
한 음식점 아주머니는 잔돈을 거슬러주면서 1천원권을 천만원 단위로 부르더라는 얘기도 있다. 1천원권을 1천만원 2천만원으로 해아리며 거슬러주는 그 아주머니의 얼굴에선 웃음기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 표정도 없이 웃음기조차 멀리한 그 아주머니의 천연덕스러운 몸짓은 바로 우리 보통 사람들의 놀라움과 비애가 얼마나 큰것이었던가를 대변해주고 있다.
우리의 놀라움은 5.18특별법 제정 소식에서 그 방향이 선회했다. 이번의 놀라움은 물론 경악이 아니라 반가움 그 자체였다. 5.18특별법 제정이야말로 「역사의 진실을 밝힐 결단」이며 「법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최상의 선택이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있을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5.18 이후 지금까지 우리 국민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부담감을 어쩌지 못하고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좀더 이기적으로 표현하자면 5.18특별법 제정은 국민들의 입장에서 볼때 그 부담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5.18특별법 제정 관련 소식이 나온 시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대선자금 희석용」이라느니 「또 한번의 깜짝쇼」라느니 등등 5.18특별법 제정 자체가 갖는 무게를 삭감시키는 의문들이 이미 제기되고 있다. 5.18특별법 제정 결단이 법 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대의적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면한 정치적 현안을 풀기위한 충격요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구에 찬 반응이 그것이다.
이같은 의문점들을 불식시키고 5.18특별법이 제 기능을 발휘할수 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의지일 것이다. 순간적 선택이었던, 궁지를 모면하기위한 방편이었건, 결국 5.18문제의 해결은 국민이 원하고 요구해온 정의로운 선택일뿐 만 아니라 오도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값진 일이기때문이다.
강도는 다를지언정 우리 국민 대다수는 5.18을 묵인한 일종의 기해자였다고 말 할 수 있다. 가해자라는 말이 지나치다면 방임자라는 표현도 가능할 것이다. 그 시대를 함께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모두 부끄러워해야 할 입장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일이다.
그중에서도 우리 언론은 그 누구보다 가해자의 입장에 섰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통제된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모든 언론은 대다수 국민들로 하여금 상황을 잘못 이해하도록 오도했다.
그러나 5.18특별법 제정과 맛물려 나오는 언론보도를 보고 또 듣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 언론은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마치 언론들은 우리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그 암울한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나타난 정의의 심판자 같은 모습을 하고있다. 오늘날 「언론=대기업」이라는 인식이 성립될 수 있었던 시기가 바로 5.6공 시절이었음을 언론은 잠시 잊고 있는것 같기도 하다.
그 시대 언론들이 진정정의의 심판자로 5.18을 볼수만 있었다면, 진리의 전달자로 5.18을 전하려고 노력했더라면 과연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바로 언론의 무한한 힘 때문이다.
「통제된 상황」이라는 것만으로 언론이 스스로 면책특권을 누리려 한다면 5.18의 주역들 외에 단죄를 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시대를 이끌어가는 주역은 역시 언론이다. 빛과 어두움을 살펴 구분하게 하고 진리와 정의의 가치를 사회속에 심는 것도 역시 언론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고 빛이 밝음을 잃으면 제 기능을 다한다고 할 수 없듯이 언론이 진리와 정의의 가치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제2의 노씨 사건, 아니 제2의 5.18을 맞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우리는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 잡고자 하는 중대한 기로에서 있다. 잘못된 관행, 잘못된 원칙 그리고 잘못된 정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 세워야 하는 시점에 있다. 물론 그 속에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잘못된 역사도 들어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것은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다. 소금과 빛의 기능을 잃어 왔던 부분에 대한 시인 없이 우리 언론은 그 누구도 단죄할 자격이 없음을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가 또 다시 역사를 부끄러워해야 하는 국민이 되어서야 말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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