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들 이사야는 1991년 다시 1학년에 복학하게 되었고 여름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왔습 니다.
91년 8월 4일 주일미사를 마치고 8월분 교무금을 내려고 사무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성당으로 급히 뛰여오는 남편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예감이 심상치 않아 뛰어가 보니 『이사야가 죽었대, 밤에 혼자 물에 들어 갔다가 못나왔다는거야.』
순간 저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주일학교 마치고 교사 피정이 있다며 어제 아침에 인사하고 나간 아들이 「그럴리가 없어, 잘못 전해진 소식일 거야」생각하면서 허둥지둥 집에 와보니 많은 교우분들이 와 계셨습니다. 그제서야 사실이구나 싶었습니다.
「문경병원」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안스러운 눈초리를 느끼면서 영안실 문을 들어서니 「고(故) 이창학ㆍ이사야」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그만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항상 주일학교에 관심이 많던 이사야가 교사를 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좋아하더니…, 주일학교 일주일동안 성당에서 마치면 곧 바로 분식점으로 와서 주일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해주면서 저의 모자(母子)는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큰 아들 이사야는 자상하고 미음직스러운 우리집의 기둥이었고 제가 그 아이에게 거는 기대 또한 컸습니다.
8월 5일.
많은 분들의 관심과 애도속에 장례절차를 마치고 피워보지도 못한 꽃봉우리는 25살의 나이로 천주교 묘지에 묻히였습니다.
『이사야! 주님품에 안기어 편히 쉬어라. 집 걱정 부모 걱정 그만하고 이 세상에서 못다한 것 하느님 나라에서 다 하거라』
『주님, 역시 자식도 저의 소유가 아니었군요. 우리에게 자녀를 허락하시는 것도, 또 이렇게 불러 가시는 것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당신의 깊으신 뜻을 제가 어찌 알겠습 니까?』
자식의 죽음은 말 할 수없는 슬픔이었습니다. 저보다 남편 비오가 애통해 하는 모습을 보면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남편은 평소에 자식들에게 관심 가져 주지 못하고 사랑해 주지 않은 죄책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빨리 슬픔에서 헤어나려 했지만 그럴수록 가슴에선 더 큰 슬픔의 덩어리가 밀려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럴때 저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 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딸이 아닌가? 이렇게 절망속에 산다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던 이사야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에도 어긋난다는 생각을 하게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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