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 하느라 그 어느때보다 바쁜 시간, 많은 사람들이 쫓기듯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문득 생각해 보면 무엇이 바쁜지 자기도 이해못할 상황속에서 그렇게 한 해를 마감하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되돌아 보면 참으로 한숨뿐인 한 해가 바로 1995년이었다. 송년(送年)을 코 끝에 매달고 있는 지금 이 시점까지도 우리 국민들은 비탄과 분노속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진리와 정의, 사랑과 행복을 추구하며 열었던 1995년이었다. 나라의 모든 일이 반듯한 질서속에서 정의롭게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면서 또 개인적으로는 그런 나라를 믿고 바르게 살면서 조금 더 행복하고 싶다는 소망으로 열었던 한 해였다.
왜냐하면 바로 지난해인 1994년 우리는「성수대교 붕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었고 다시는 그같은 끔찍한 사건으로 온 국민이 애통해 하지 않기를 한 마음으로 기도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리만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라, 교수 아들의 부모살해사건 등으로 우리가 입은 마음의 상처는 표현이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1994년은 95년의 우리에게 94년의 가혹함을 그대로 물려주고 말았다. 우리의 기도와 정성이 부족했던지 아니면 우리의 다짐과 각오가 말뿐으로 끝났던지 우리는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 사건에 이어 삼풍백화상점이 무너져 내리는 믿지 못할 사건 앞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망각이란 것이 인간에게 있어 가장 요긴한 단아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정녕 실감이 나기도 한다. 만일 잊어버리지 못했다면, 줄줄이 터지는 사건, 사고를 우리의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했다면, 아마도 우리 국민가운데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삼풍사건이 주는 비탄과 충격속에서 무덥고 긴 여름을 보내야 했던 우리는 한해를 마감하는 올 겨울, 전직 대통령들의 구속 사태와 직면하고야 말았다. 어차피 터질 수 밖에 없는 일이었고 또 터져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들은 한 나라의 운명을 한 손에 쥐고 있었던 최고 통수권자들이었고 그것은 그만큼 그들이 책임져야할 몫이 크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과정을 제대로 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음 단계로의 성장을 보장받을 수가 없다. 잘못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고 휘어진 나라의 허리를 바로 펴는 일은 우리의 반듯한 미래를 약속받는 일과 다름이 없다. 그것은 또 나라의 최고 책임자들이, 정치인들이, 권력가들이, 재벌들이, 책임있는 지도자 모두가, 다시는 우리 국민들을 우습게 보지 않도록 단단하게 울타리를 치는 일과도 같다.
그러고 보면 이제 우리가 겪어야 할 엄청난 일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겪어서는 안될 일들조차 우리는 겪었고 더 이상의 아픔은 없을 것 같은 아픔까지 우리는 당해야 했으며 가슴 저 밑바닥까지 비탄에 잠겨야할 이들이 수도 없이 반복해서 발생해 왔다는 사실이 우리의 이같은 자괴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분명해졌음을 인지해야만 한다. 어둡고 침침한 과거에 맥없이 주저앉고 말 것인가. 그 과거를 안주 삼아 현재의 아픔을 남의 탓 타령으로 오늘을 낭비할 것인가. 아니면 어두운 과거와 오늘의 아픔을 모두 함께 나누어 지고 당당히 미래의 문을 두드릴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강생하셨다. 우리의 약속과 다짐을 번번히 배반당하시면서도 그분은 또 다시 우리에게 오셨다. 미움과 탐욕으로 가득차고 질시와 반목으로 뒤엉킨 우리 가운데 그분은 지칠줄도 모르고 또다시 오신 것이다.
김추기경은 이번 성탄절메시지를 통해『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와 그 벌을 홀로 당신 한 몸에 대신 지셨으며 성탄은 바로 이처럼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던 그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날』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김추기경은 또『우리 모두는 성탄에 오신 구세주 예수의 마음,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되 겸손과 온유로 사랑과 용서를 베푸는 마음으로 오늘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만일 이런 정신으로 우리가 뜻을 모으고 힘을 모을때『이번 기회는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음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구조악인 부정 부패, 정경 유착, 뇌물 수수, 공직자 비리등을 척결하고 우리로 하여금 불신주의와 황금 만능주의를 씻고 참된 가치관 확립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의 때, 구원의 때가 될 것』이라고 김추기경은 선언했다.
그분의 지적대로 오늘의 아픔은 비단 어느 한사람만의 회개로 치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을 필요가 있다. 역사는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나물의 그 밥」이라는 말이 있듯「그 민국에 그 대통령」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한번 명심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1995년을 진정「안녕히」떠나 보낼 수 있는 오직 한 길 임을 마음에 새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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