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지나는 것이라고…. 태풍이 할퀴고 간 상흔에 농부의 한숨은 아직도 하늘가를 찌르는데, 옥빛 하늘은 시치미 뚝 떼고 하얀 구름을 몽글몽글 그리고 있다. 그리고 채 여물지 못한 과일이 시름 속에 뒹굴던 대지에는 가을꽃무리가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늘이 그린 구름이나, 땅을 수놓을 구절초 꽃에서 뉘가 더 하양일지 눈부신 가을색 품평회라도 열어야 할 때가 됐다. 뽀얀 옥양목을 널어놓은 듯 구절초 하얀 꽃길이 별천지를 이루던 소동공소가 광폭한 태풍에 무탈한지 선교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구절초가 뿌리를 깊게 내린 뒤로 태풍이든 폭우든 잘 견디고 말짱하다고 하셨다.
백년 된 소동공소의 임 라파엘 선교사는 주변 경사진 언덕에 드러난 흙이 무너질까 염려됐다. 국화과 식물의 번식력과 뿌리의 힘을 알고 있던 선교사는 공소 공동체 식구들과 구절초를 심고 십자가의 길을 내고 성모동산을 만들었다. 심은 지 육년 된 구절초는 흙이 숨을 쉴 수 있는 뿌리의 옹벽으로 꽃길을 내었다. 시나브로 세상의 초록이 지쳐갈 때 ‘돈으로 살 수 없는 지혜의 가치’(욥기 28, 12)로 피워낸 꽃 천지이다.
어디 꽃길뿐인가. 음력 구월 구일이 되면 아홉 마디로 자라는 구절초는 어미의 젖줄 같은 선모초(仙母草)이다. 우리 어머니들의 부인병에 꽃이 달린 풀 전체를 삶아 마시던 선약이었다. 누이의 머리핀 같은 구절초 꽃을 머리에 꽂고 십자가 길을 따르며 어머니의 기도를 음송하다 한 잔 구절초꽃차를 마시는 것은 가을여행의 비법이다.
길은 애초에 없었다. 오가던 사람들의 발자국이 길을 내었다. 희망도 그러하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지혜와 믿음이 깊게 내린 옹벽은 희망이 실현되는 디딤돌이다.
다 지나는 것이라고 해도, 희망은 늘 그 자리에서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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