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을수록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것이 어르신들의 말씀이다. 어렸을 때에는 무슨 말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리고 어느덧 중년이 되어 그걸 체감하게 된다.
골목길에서 종일 놀던 어릴 적에는 하루가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 어스름녁 집 대문을 들어서면 고단함에 저녁도 못 챙기고 푹 고꾸라질 때까지 놀던 그 어릴 적에는 놀이를 하는데, 엄마의 방해만 없으면 하루로 충분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시간이 어찌 그리 더디던지.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운동장을 뛰는 시간보다 많아지던 중학교 때도 하루가 짧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공부하고 남는 시간은 충분했고, 친구들과 농구를 하건 떡볶이 집에서 군것질을 하건 시간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못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입시공부에 매달리던 고등학교 시절, 시험 범위는 넓고 할 공부는 많았기에 조금은 시간에 쫓기긴 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어도 친구들 만나고 성당에 가서 하릴없이 노닥거리기에 하루는 충분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해서 내 아이들을 낳아 키우던, 20대와 30대의 시간들은 언제 지났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방 늘리기에 이어 집 늘리기, 아이들 머리 크는 모양들을 보면서, 한 푼 두 푼 알뜰한 살림하기에 언제인지 모르게 시간은 흘러갔고, 이제 어느덧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어섰다.
시간의 빠르기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40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인 듯하다. 언제부턴가 모든 일들을 하루가 아니라, 주간 단위로, 월 단위로 헤아리고 계획하기 시작했고, 작심해 어떤 일을 도모할 때 그 단위는 햇수가 되어갔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자 할 때, 거기에 필요한 시간의 크기가 훨씬 커졌다는 것, 어릴 적과는 달리 무척 많은 양의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40대의 시간은 30대의 시간들보다 그 양이 적다. 그리고 50대는 40대보다, 60대는 다시 또 50대보다 시간의 양이 적거나 혹은 더 빠르게 소비된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점점 더 빠르게 흐르다가 더할 나위 없이 빨라질 때, 그때가 바로 이 세상을 떠나가는 순간이 아닐까?
최근 아버님의 시간이 그렇게 빠르게 흐르는 것을 보았다. 손톱만 하던 아기가 자라나 어른이 되어서, 가장 빠른 시간을 경험한 뒤에는 먼지처럼, 한 줌의 재로 화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누구나 보고, 앞으로 누구든 겪을 일이면서도 정작 그 경험은 상투적인 체험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그 체험은 누구에게나 똑같지만, 모두에게 자기만의 고유한 실존적 고민으로 겪어진다.
그 실존적 체험을 통해 필자는 약간의 정신적인 변화를 느꼈다. 항상 실존적 부재의 두려움을 어릴 적부터 가슴 속 깊은 공포로 담고 있던 필자는 그런 고민을 압축해 보여준 아버님의 부재를 통해 다시 한 번 내게 남겨진 시간의 단위를 헤아리게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낸 시간보다 남겨진 시간이 더 많다고 할 수 없는 연배의 내게 그러한 체험은 오히려 편안함을 주었다. 더 바쁘게, 더 효율적으로 남은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는 조바심보다는, 어찌해도 한계를 넘을 수 없다는 체념, 한계의 분명한 인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업적이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체험이 오히려 조급한 마음을 한 걸음 물러서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십자가상의 예수님, 그분께의 의탁이 그 한계의 영역을 확장시켜 줄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닫는다. 내가 아무리 어찌해 봐도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실존의 한계, 그 앞에서 사람이 의미 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 있는 분께 나를 맡기는 것, 그것 밖에 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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