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위령성월이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란 말이 어느 때보다 실감있게 다가오는 위령성월은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다. 언젠가는 죽게 될 우리의 모습을 묵상해 본다는 면에서 겸허함과 겸손함을 주는 의미있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현세에서의 죽음은 암흑이요 좌절이며 허무이다. 하지만 신앙인들에게 죽음은 지상순례의 끝이며, 영원한 생명 곧 하느님 나라에 드는 관문이다. ‘죽음이 곧 생명’이라는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교회는 ‘모든 성인의 통공’ 교리를 통해 죽은 이와 산 이의 소통을 고백하며 위령성월에 특별히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한다. 통공은 말 뜻 그대로 죽은 이와 산 이가 서로를 위해 바치는 정성과 기도가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효력을 발휘한다는 의미다.
죽음을 통한 생명의 전형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에서 확인한다. 완전한 신이며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는 육화를 통해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 하지만 인간됨(강생)의 신비는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최종 실현됐다.
교회는 종말론적인 생명을 강조하면서도 현세 삶의 의미와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죽음은 한순간에 무의미하게 닥치지 않는다. 시 공간의 차이는 있더라도 현세에서의 삶이라는 과정을 거쳐 맞딱드리는 현실이다.
따라서 죽음은 현세 삶의 종말을 의미한다. 현세 삶이 없다면 죽음도 없다. 20세기 신학자 칼 라너의 말처럼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죽음은 얼마나 복된가. 그러나 그러한 죽음을 있게 한 이승의 삶은 또한 얼마나 고귀한가”.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란 격언은 죽은 이들이 산 이에게 하는 말이다. 죽음은 누구도 예외가 없다. 이 세상 어떠한 가치도, 즐거움도, 희망도, 죽음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하지만 죽음을 넘어서는, 죽음을 통해 얻게 되는 참 생명을 믿기에 우리는 희망하며 오늘을 살 위로와 힘을 얻는다.
위령성월을 맞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 삶이 의미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죽음을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사랑의 삶임을 몸소 보여주셨다. 우리는 나보다는 이웃을 위해 사는 사랑의 사도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위령성월을 맞는 신앙인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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