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복지 실상
겨울의 문턱으로 접어들고 있는 요즘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모녀가 함께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건이 잇따르고 있어 안 그래도 싸늘한 날씨에 우리의 마음을 더욱 춥게 만들고 있다. 지난달 26일 인천의 한 아파트에서 이모(48·여)씨와 어머니(73)가 나란히 숨진 채로 발견됐다.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이씨는 7개월째 월세를 내지 못하는 등 생활고에 시달리다 번개탄을 피워놓고 목숨을 끊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보다 며칠 전에는 한강에서 80대 노모와 40대 딸이 서로의 몸을 끈으로 묶은 채 투신자살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이들 역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 함께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또 전라남도 고흥에서 조손 가정의 할머니와 손자가 촛불을 켜놓고 잠들었다가 불이 나 숨지는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전기요금을 못내 전기가 끊기자 촛불을 켜고 생활해왔다고 한다. 새벽에 손자가 소변을 보려고 일어나면서 촛불을 켰다가 그대로 잠든 게 화재 원인으로 추정된다. 이른바 선진 복지국가로의 도약을 도모한다는 우리나라에서 언제까지 이런 안타깝고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지 답답하다.
촛불화재 사망 사건과 이들 모녀의 잇따른 동반자살은 선진 복지국가로 도약하고 있다는 대한민국의 복지 실상을 말해준다. 동반 자살한 이들 모녀는 모두 단 둘이 살며 생활고에 시달려왔다. 고혈압과 중풍, 골절, 우울증 등 각종 질병을 앓아온 것도 비슷하다. 이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줄 만한 능력이 있는 가족이나 친척도 없었다. 월 몇 만 원의 기초노령연금 외에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고 기초수급생활 보장 대상자도 아니어서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고흥 촛불 화재사건 역시 복지의 사각지대에 처해 있는 취약계층의 어려운 삶을 웅변해 준다. 한 달에 3만 원도 못되는 전기요금을 내지 못해 전기가 끊겼다는 것이다. 한전은 단전이 아니고 전류제한조치를 했기 때문에 몇 개의 전등과 TV, 소형 냉장고 등은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전기가 완전히 끊긴 줄 알고 촛불을 켜고 생활했다고 한다. 전기료도 못 낼 정도로 어렵게 산 이들의 생활을 살펴보면 일선 복지 정책에 허점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주변의 이웃들에 의하면 숨진 김모(58)씨 와 김씨의 남편 주모(60)씨는 모두 몸이 성치 않고 수입이 전혀 없는데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지정대상에서 제외됐다. 주씨가 근로능력이 있고 딸이 3명 있다는 등의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 부부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일할 능력이 있었다면, 자식들이 병든 부모를 부양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있었다면 이들이 추위 속에 촛불을 켜놓고 잠들었다 숨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화재에 의한 죽음이든 동반 자살이든 이들의 죽음이 몇몇 가정의 개인적인 비극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이들이 복지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경위를 파악해 문제점을 철저히 개선해야 한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딱한 사람들은 없는지 조사해 이들이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줘야 한다. 그래야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또다시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내년도 복지예산이 처음으로 100조원을 돌파한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전체 예산의 총지출이 5.8% 증가하는데 비해 복지예산의 증가는 4.7%에 불과하며 증가액의 상당부분이 건강보험료나 노령연금 등 자동증가분, 즉 의무적으로 지출해야하는 부분이라 실제 복지가 확대됐다고 평가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취약계층인 기초 생활 수급 대상자와 예산이 줄어드는 등 정부의 복지정책이 거꾸로 가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앞으로 국회의 예산 심의 과정에서 여야가 꼼꼼히 따져 개선해야 할 것이다.
복지의 확대는 지금 정치권의 시대적 화두로 떠올랐다. 무상보육에 무상급식, 무상의료, 반값등록금 등 각종 복지공약이 난무하고 복지 포퓰리즘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러나 당장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이야 말로 그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절실한 복지의 최우선 과제이다.
대선 후보들은 저마다 복지의 확대를 공약하고 있다. ‘국민이 행복한 세상’, ‘사람이 먼저인 사회’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표를 의식해 거창한 복지공약을 남발하기보다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서민복지의 강화에 최대 역점을 둬야 할 것이다. 목소리가 큰 계층의 복지보다는 소외되고 방치된 취약계층의 보호에 우선적이고도 더욱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김태식(토마스) 회장은 1978년 영자신문 코리아 헤럴드에 입사, 경제부·정치부 기자로 활동했으며, 1981년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에 입사해 해외경제부 차장, 영문경제뉴스부 부장, 국제국 기획위원 등을 역임하고 현재 연합뉴스에서 북한 관련 영문뉴스를 다루고 있다. 서울 가톨릭신문·출판인협회 회장에 이어, 올해 2월부터 서울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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