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한 학기는 항상 학생들보다 조금 늦게 끝난다. 강의는 끝나도 평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강의보다 마지막 과정인 평가가 더 어렵고 곤란하게 여겨진다. 종강이 다가오면 상대평가로 학점을 매겨야 할 생각에 꽤 큰 심리적 압박을 느낀다.
시험을 치면 편할 텐데 가르치는 과목이 ‘글쓰기와 토론’ 실습 수업이니 학생들이 제출한 여러 편의 글과 토론으로 점수를 매길 수밖에 없어 더욱 그렇다. 가능한 한 객관적이기 위해 평가지표를 세분하고 여러 항목의 점수를 합산하는 식으로 나름 노력할 뿐이다. 학생들의 수업 태도에 따른 나의 평소 감정으로 글을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몇 번씩 되물어보기도 한다.
나는 학점을 매기는 일에 왜 이리 신중을 기할까 생각해보았다. 성실한 한편 우유부단한 성격 탓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취업이 어려운 요즘 대학생들이 학점 관리에 얼마나 철저한지, 그들에게 학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결석을 거의 하지 않는다. 결석한 경우라도 요구하지도 않은 진료확인서를 꼬박꼬박 제출한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최저 임금의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이렇듯 다들 힘들게 학교를 다니는데 내가 학점을 잘못 매기면 몇 년 후 취업에 영향을 미치는 건 물론이고 당장 다음 학기 등록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도 있기 때문에 도저히 방만할 수 없는 것이다.
한 학기가 끝나면 학생들이 성적표를 받아들듯, 세밑이 되면 우리는 저마다 지난 한 해를 평가해본다. 한 해를 돌아본 자신의 점수에 자신만만하거나 만족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늘 모자라고 어리석고 참되게 살지 못하는 나니까. 하지만 나를 평가하는 누군가가 내 점수를 최대한 공정하고 후하게 주기 위해 고민한다면, 나의 부족함을 다 알면서도 모든 걸 감싸주려고 한다면 나는 또 새로운 한 해를 살아낼 힘을 얻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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