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병원 영안실 가을 햇살처럼 따사로운 미소로 그녀가 우리를 맞고 있었다. 대개는 엄숙한 표정의 모습으로 놓여 있는 사진과 달리, 하얀 백발에 빨간 립스틱으로 치장하고 웃고 있는 얼굴은 생전에 쾌활했던 그녀의 모습처럼 화사해 보였다. 흰 장미꽃으로 장식된 제단 앞에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을 일일이 알아보는 듯이 바라보고 있다.
월계동본당에서 30년 동안 레지오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누이님, 조인환(헬레나)의 장례미사가 신자와 단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집전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오던 날 보다 가는 길을 배웅하는 객들이 많은 것은 그녀가 밟아온 세월의 열매이리라.
두어달 되었을까, 미사가 끝나갈 무렵 신부님의 말씀이 있으셨다. “장수사진을 촬영하니 65세 이상 되신 분은 참여 신청을 하시라고” 사진관을 운영하는 교우 한 분이 봉사를 하신다고 하였다. 우선 남편은 통과 자격이 되었다.
‘장수사진’이라고? 영정사진을 누가 지은 이름인지 들을수록 정감이 간다. 딱 한번, 자신이 없는 곳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이해야 하는 사진. 언뜻 생각하면 성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진이다.
신청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레지오 활동을 같이 하는 자매에게 물어보았다. “혼자 사진관에 가서 찍는 것보다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오래 전에 오라버님이 동사무소에서 장수사진을 찍고 오셨다기에 “왜 그런 사진을 찍으세요?”하고 퉁명스럽게 말씀 드린 적이 있다. 무궁할 것 같은 정다운 오누이의 인연에, 느닷없이 이별을 예고하는 것 같은 슬픈 생각이 들어서 한동안 우울했었다.
예정된 날, 마음은 유쾌하지 않으면서도 남편의 옷차림을 다독여 주어 성당에 갔다. 젊은 행사요원들이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어 주고, 얼굴에 약간의 화장도 해주었다. 한결 단정한 모습이 되었다. 의자에 앉아 자세를 바로 하자 ‘펑’ ‘펑’ 전기불꽃 터지는 소리가 나고 촬영은 끝이 났다.
사진을 찍고 나오면서 남편의 손을 잡아 보았다. 표정이 없던 남편도 손에 힘을 주어 잡아 주었다. 따뜻함이 전해왔다. 얼마 만인가, 마음을 열고 손을 잡아 본 것이…. 서로를 탓하고 미워하며 보낸 시간들, 애매하게 서있는 동안 세월은 많이도 흘러갔다. 부딪히며 깎이어 서로를 향한 애틋한 감정도 무뎌져 버렸다.
그리고 몇 주 후, 사진 전시회가 있었다. 연세 드신 자매님들의 분홍색, 물색 한복 입은 고운 모습의 사진이 액자에 담겨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예쁘게 웃는 얼굴은 소녀 같기도 하고, 어떤 형제님은 무표정한 얼굴이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사진 속에는 평소 주인공의 형상이 거울처럼 반영되어 보이는데, 한 자매님은 실물보다 영 마음에 안 들었는지 사진기술이 없다고 불평을 했다. 단체 회장님도 계시고 근엄한 모습의 여학교 때 은사님도 계셨다. 촬영을 망설이던 생각이 나만의 우려였음을 알게 되었다.
나무는 심은 지 5년이 되면 땅에 완전히 뿌리를 내려 자랄 준비를 마친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어떤 세찬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잘 견디어 튼튼한 나무로 자랄 준비가 되었는데, 파장에 봇짐을 싸는 심정으로 장수사진을 찍었다.
아직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청산하지 못한 빚처럼 정리하며 주고받아야 할 정이 많이 남아 있다. 남편은 술을 몹시 좋아하여 알록달록 오색실을 엮어야 할 신혼 초에 내 속을 무던히도 태웠고, 내가 아파 누워 있어도 정다운 말 한마디 안 해주었던 일이 있었다. 나도 본성이 사분사분하지 못하여 남편에게 좀 더 살갑게 해주지 못했고, 밖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가정살림을 소홀히 한 점 등등, 이런 것 저런 일 생각하며 손으로 꼽으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요즘은 자주 서로를 편안해진 마음으로 바라본다. 내가 마음으로 짚어가며 하나 둘 실천해 가고 있는데, 남편도 안 했던 행동을, 전혀 할 줄 몰랐던 말을 반복하고 있다. 고마워, 미안해. 자기도 빚이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말로는 안 된다고 혼자 말처럼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이고 있다. 빚을 모두 갚으려면 앞으로 우리는 백년을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러기 위해서 채무자를 달래듯이 오늘 아침, 식전에 먹으면 보약이라는 사과 반쪽을 더 얹어 주었다. 그랬더니 남편은 자기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알고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장수사진을 찍고 시작된 동상이몽은 언제쯤 깨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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