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교황의 사임과 신임교황의 선출
전임교황의 사임 발표로 시작하여 콘클라베의 과정과 신임교황의 선출과 즉위까지,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세계의 이목이 바티칸에 쏠렸다.
우리나라 언론도 많은 관심을 보였고, 이태리에서 공부를 하지 않아 이태리말도 모르고 바티칸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나에게까지 주교회의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인터뷰 등을 요청하는 바람에 겸손하게(?) 사양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방주의 창에는 내다보는 것뿐 아니라 들여다보는 기능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인터넷에서 기사들을 읽다보면 아무래도 내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들도 눈에 띈다. ‘교황 사임의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음모론적인 기사부터, ‘다음 교황이 누가 되든 관료들의 꼭두각시가 될 것’ 이라는 은근(아니, 대놓고?) 저주성의 기사까지. ‘추기경들의 합종연횡 정치판 못지않아’라는 기사 제목이 있어서 도대체 무슨 소린가 하고 읽어보니 콘클라베를 앞두고 추기경들의 장면을 본 기자의 해석이었다. 아무리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또 자기가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하지만, 참 생각과 보는 눈이 다양하다고 느꼈다.
물론 호의적이거나 중립적인 기사가 훨씬 많기는 하였다. 전임교황의 용기 있는 결단과 신임교황의 소탈하고 청빈한 성품에 대한 칭찬과 기대, 세속의 모습과 대조되는 부분에 대한 관심 등이 참된 영적 지도자를 갈구하는 세상 사람들의 바람을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최초의 미주대륙 출신 교황이자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이면서 최초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하신 새 교황에 대해 사실 개인적으로도 감사와 기대가 크다.
예수님 향한 ‘환호·음모’
성주간을 지내면서 예루살렘 입성부터 수난과 부활에 이르는 이 한 주간 모든 이의 이목과 관심의 중심이 되신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본다. 한편으로는 제자들과 군중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을 죽이려고 치밀한 계획을 짜고 벼르고 있는 반대자들의 음모 속에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성목요일 만찬 때까지도 그분이 맞이하시려는 수난과 죽음에 대해 별 눈치를 채고 있지 못한 열한 제자들과 배신을 계획하고 있는 한 제자와 동행하며 반복하여 당신의 길을 예고하시는 예수님.
자신을 부인하고 입고 있던 옷마저 벗어버리고 도망간 제자들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을 쓰고 십자가 위의 당신을 조롱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아버지께 그들의 용서를 청하시는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신앙을 북돋아주시고 당신의 사명을 전해주신 예수님. 그분은 그야말로 묵묵히 당신의 길을 당신의 보폭, 당신의 페이스로 걸어가셨다.
제자들은 세상의 환호에 우쭐했겠지만 정작 어린 나귀 위의 예수님은 덤덤하셨거나 착잡하셨을지, 아니면 다른 방향의 사명감으로 가슴이 벅차셨을지 모르겠다. 치밀한 음모를 계획하는 반대자들은 기세가 등등했지만 이를 다 아시면서 그 덫 한가운데로 나아가시는 예수님은 용감함을 넘어선 초탈한 심정이셨으리라.
물론 그것은 가까운 제자들을 데리고 게쎄마니에 오르시어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명을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피땀을 흘리며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마지막 번민을 겪으신 뒤였다. 이어지는 수난의 길, 당신을 위한 비통한 울음도, 악의에 찬 고함도, 조롱과 학대도, 그분이 걸어가시는 길의 고독과 적막함을 채울 수 없었으리라.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 23,28),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분의 길에 참으로 함께 계셨던 분은 아버지 한 분 뿐이셨다. 다른 이들과 소통하려는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마도 나중에야 그것은 기록되고 전해지고 귀 기울여지리라.
그 순간 그와 함께 하신 분, 그와 소통하시는 한 분, 그 아버지께 그분은 백성의 용서를 부탁드리고, 당신의 영을 넘겨주신다. 죽음의 순간, 가장 진실하고 거룩한 순간, 아무도 방해하거나 참견할 수 없는 그런 시간이다. 예수님의 성주간은 내내 바로 그러한 시간이었다.
전임과 신임, 두 분의 교황께서 걸으셨고, 또 걸으셔야 하는 길도 바로 그런 길일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걸어가야 할 여정도 다르지 않다. 고독하게 주님과 함께 걷는 길만이 우리를 이웃에게로 이끌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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