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과 을(乙)의 불평등한 관계
갑과 을이라는 용어가 일상 속에서 쓰이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조금은 생소했던 이 말이 언제부턴가 일상의 대화 안에 자리잡더니 무척 유명한 개그 프로그램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해주는 이 말이 이렇게 순식간에 대세가 된 것은 갑과 을의 불평등한 관계가 근래에 급격히 심화되었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계약서의 갑과 을의 관계는 본래 불평등해서는 안된다. 계약이라는 것 자체가 서로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고 서로의 이익을 보장하고자 하는 행위이니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각자의 처지에 따라 계약의 내용 자체가 한쪽에 아주 불리하게 작성되기도 하고 그 이행에 있어서도 강자가 여러 수단을 사용해서 약자를 착취하는 일이 자행되기도 한다. 이것이 당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상생의 원리’ 무감각해진 사회
강자와 약자가 있는 세상이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계약관계라 해도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이해와 배려, 상생의 원리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양식이 건강한 사회의 토대이다. 이것이 무너진 사회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어버릴 것이다.
아주 어릴적부터 강요되는 극심한 경쟁과 시장만능주의, 강자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정책과 베푼다는 관점만 보는 복지정책 등은 이렇게 지극히 기본적인 전제를 잊어버리게 한다.
최근 몇 가지 사건을 통해 갑의 횡포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표출되었다. 그런 횡포를 막는 법적인 장치도 마련한다니 기대가 된다. 하지만 법이 이 분노에 대한 최종의 답이요 해결책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이 분노는, 상생의 원리보다 강자의 전횡을 당연시하고 받아들이며 갑의 입장을 동경하고 지향해온 나 자신에게 향해야 한다. 그리고 때때로 보기 흉한 갑의 노릇을 하는 나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여섯 가지 반성
갑 중의 갑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어 을이 되는 법을 몸소 보여주신 신비를 묵상하며 나의 ‘여섯 가지 갑질’을 꼽아 반성하고 경계하고자 한다.
첫째,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청할 때, 나는 도움을 줄 수도 안줄 수도 있는 갑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결코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가 있으니 나는 을이다. 어떻게든 도우려 노력하되 돕지 못하면 마음의 빚을 지는 을이어야 한다.
둘째, 사람들이 나에게 말씀을 청할 때, 나는 나의 명석한 지식이나 사상을 베푸는 갑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내 말과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해야 하는 을이다. 말 뿐아니라 삶으로도 전해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안은 을이다.
셋째, 내가 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 때, 그 이유가 나의 지위나 권력 때문이건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건 나는 내가 칼자루를 쥔 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내게 주어진 지위나 권력은 책임을 동반하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곧 나를 해치는 것이니 나는 칼끝을 마주한 을로서 섬세한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넷째, 일상의 곳곳에서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을 때, ‘내가 돈을 지불하니까’, ‘이게 그들의 일이니까’라는 생각으로 갑 노릇을 하려고 하지만, 나는 그들의 도움없이는 절대 살아갈 수 없는 을이다. 존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다섯째, 나에게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을 때, 나는 내 돈을 내가 쓰는 것이니 갑이라고 생각하지만, 열심히 일해도 그것을 얻지 못하고 심지어 아주 기본적인 필수품마저 부족한 이들을 생각하면 나는 을이다. 나의 사치에 대해 나는 절대 떳떳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멋대로 살고 허비할 수 있는 내가 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고귀한 은총의 선물이므로 값지고 소중하게 열심히 매순간을 살아야 한다.
나를 자녀라, 벗이라 불러주시고 성령의 선물로 내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은 참된 갑의 자세를 가르쳐주신다. 갑이 지니고 살아야하는 도리는 을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스스로를 경계하고 낮추고 두려워하며 삼가는 마음이다. 성령께 입곱 은총 중에 특별히 두려움의 은총을 청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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