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집 뒤엔 작은 산이 있다. 해발 100미터.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 안쪽이다. 작아도 나무들이 빼곡해 그늘 짙은 흙 길과 물 맑은 약수터, 푸드덕 꿩이 날고 딱따구리가 나무에 구멍을 내는 야무지고 바지런한 산이다.
지금 거기는 오월이 한참이다. 무슨 알 수 없는 기운이 산을 휘감고 덮어 없던 것들이 생겨나고 죽었던 것들은 살아나 온 산 구석구석이 환하고 말갛다. 목을 꺾어야 눈이 닿는 키 큰 나무 그 많은 가지, 어인 일로 하얀 꽃은 저토록 장엄하게 가득한지. 볼품없이 엉켜있던 잡목은 또 어인 일로 저토록 여왕처럼 차려 입었는지.
백만 볼트 전구 백만 개가 한꺼번에 켜진 듯, 산에 가득한 이 알 수 없는 기운에 술 취한 듯 걷다가 연초록 뱀을 만났다. 녀석은 붉은 진달래 뚝뚝 떨어져 있는 길을 쓱쓱 배로 밀며 반대쪽 수풀로 가는 중이었다. 지팡이만한 녀석의 몸뚱이는 매끈하고 단단했고 얼룩 한 점 없는 연초록으로 햇살을 받아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녀석은 길 한가운데 서서 옆 눈으로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하던 일 계속 해, 괜히 아저씨들 눈에 뜨이면 소주에 담긴다” 순간, 초록 뱀이 픽 웃은 듯 했다. 분명 녀석의 입 꼬리가 실쭉 했다. “이거 보슈, 이 산이 다 내 건데 언놈이 날 어쩐단 말이요, 유치하긴” 초록 뱀은 여유 있게 사라졌다. 수풀사이로 스르르 말아 쥐는 꼬리가 여왕의 치맛자락 같았다.
“시냇가에 피어나는 장미처럼 번성하여라. 유향처럼 향기를 내뿜고 백합처럼 꽃을 피워라” 집회서의 축복이다.
현실가능성 만점의 축복이다. 백만 볼트 백 만개 전구를 한꺼번에 켜는 것쯤은 일도 아닌 하느님이 뒤에 계시는 덕분이다. 그분 덕분에 온 세상이 눈부시게 화려하고 강력하게 아름다운 여왕으로 거듭나면 좋겠다. 그분 덕분에 나 이엘리도 당당하고 넉넉한 여왕으로 늙어 가면 좋겠다. 당신 것을 끔찍이도 아끼는 분이시니 ‘그러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도 현실가능성 만점의 소원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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