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넘게 연습해 온 작품 하나를 얼마 전 무대에 올렸다. 총 스물이나 되는 ‘예술가들’ 땀의 열매다. 예술가에 힘주었다고 부디 아니꼽게 생각 마시라. ‘빨리, 많이’를 위한 질주의 세상에서 그와는 정반대로 살고 있는 동료들의 눈물과 열정에 대한 연민이니. 공연은 달랑 하루. 하루 공연에 한 달 연습. 홍보성 제로에 수익성 마이너스다.
아무튼, 한밤 중 낯선 곳에 황망한 꼴로 있다가 좌우에 눈이 익어 앞이 좀 보이다가, ‘이거야!’ 하고 올랐던 산을 ‘아닌가 봐’ 하고 내려오기 수십 번 하다가, 길이 나고 빛과 색이 채워져 생겨난 여기엔 이제 자기들도 늙어가는 두 딸과 진작부터 늙어있는 엄마가 있다. 이들 셋은 목욕을 간다. 새침하게 몸을 사리던 작은 딸이 ‘머리 굵고는 처음 하는’, 그러니까 삼십 여 년 만의 모녀상봉 목욕이다.
‘겹겹이 늘어진 뱃가죽을 잡아 당겨야 비누칠을 할’ 수 있을 만큼 늙은 엄마 역을 연습하면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안 할 도리가 없었다. 나도 작은 딸처럼 엄마와 같이 목욕 한 기억이 없다. 엄마와 내가 같이 홀랑 벗고 있는 것도 징그럽게 민망하고, 엄마에게서 내 미래 모습이 겹쳐보여 진저리 쳐져서이다. 엄마 엉덩이 옆에 붙어 앉아 군것질 하며 같이 텔레비전을 본 기억도, 비싼 녹즙기를 사주기는 했어도 녹즙을 짜 준 기억도 없다.
용돈은 정해진 날에 흰 봉투에 넣어 잘 보이게 놓았다. 예쁘게 생기신 엄마는 ‘내가 딸 하나는 잘 두었네’ 그러면서 사름사름 웃으셨는데 지금은 잘 안다. 그게 아님을. 끔찍이도 잘난 척하는, 매우도 쌀쌀맞은 딸년을 향한 무언의 질타임을. 편하고 넉넉하게 사랑받고픈 안 들리는 외침임을. ‘효도집행’ 후 휙 사라지는 딸년 등짝 뒤에서 엄마는 많이 쓸쓸하셨으리라. 작품 속 작은 딸은 엄마 등을 힘껏 밀어준다. 나는 어쩌랴, 등 밀어 줄 엄마가 없는데. 무대 위에서 ‘야야, 뭐 허냐, 좀 박박 밀어라’ 하는 걸로 대신할 밖에. 엄마가 내게 했음직한 그 목소리로. 내가 한번만 더 듣고 싶은 꼭 그 말투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