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고 사랑하는 시인 정채봉은 두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고 한다. 엄마는 겨우 스물. 시인은 죽어 엄마를 만나면 “젖가슴 한번 만지고 그때 그 일을 딱 하나 일러바치고는 엉엉 울겠다”고 했다.
시인의 ‘그 일’이 뭐였을까.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꺼지는, 억장 무너지게 서럽고 억울한 일이었을까. 내가 잘못한 건 없는데, 내 뜻은 그게 아니었는데 그만 그렇게 돼 버린 일. 아무한테도 말 못하는 아니, 아무 말도 하기 싫은, ‘흐유- 내가 소설을 써도 열권은 써’하는 바로 그 일. 오만가지 사연에 오만가지 모양과 색을 지닌 ‘그 일’이 사람 가슴마다 하나씩은 묻혀 있지 않을까.
내 안의 ‘그 일’, 시인처럼 엄마께 일러바치고 엉엉 울 수도, 애틋한 마음으로 곱씹을 수도 없는. 자랑도 훈장 깜도 결코 아닌. 뜬금없이 불쑥 치밀어 번열이나 나게 하는 그 일.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였음이 틀림없는. 고해소에서 진땀 흘려가며 고백을 하고도 잊히지도 엷어지지도 않는 그 일의 기억. 내가 죽어 내 가슴 살이 썩으면 그때서나 같이 썩어질까.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바오로 사도의 탄식이 가슴을 친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약이거니’하고 지그시 잘도 견뎌낸다. 싹도 안 나고 뿌리도 안 썩는 그 일이 생니 뽑은 것처럼 아프고 쑤시는데도 뚝심 있게 버틴다. 정말 시간은 약인지 ‘왜 하필 나야’ 펄펄 뛰던 마음이 ‘어째 이런 일이’라며 슬퍼지다가 ‘하느님만은 아실거야’하며 기운을 차린다.
참 장하고 멋지다. 나의 시간도 약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는 수호천사조차 고개 돌려 버릴 부끄럽고 한스러운 그 일을 이제는 그만 툭 털고 쓸쓸하게나마 웃을 수 있을까. 썩는데 백년 걸린다는 고무타이어보다 더 질긴 그 일의 기억을 시간의 약발로 다시 묻는다. 눈물 몇 방울과 쓴 웃음 몇 줌을 섞어서. 마늘을 묻으면 마늘이 나고 감자를 묻으면 감자가 나듯 이렇게 묻어둔 그 일에선 삶의 뚝심이 나리라. 금리 낮은 정기적금처럼 성에는 안 차도 이자가 붙은 삶의 뚝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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