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16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는 한 복녀의 시성식이 거행됐다. 이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성녀로 선포한 이는 ‘잔나 베레타 몰라’(Gianna Beretta Molla, 1922~196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을 통해 그를 ‘단순한 여성, 그러나 누구보다도 의미 있는 하느님 사랑의 메신저’라고 천명했다. 성녀는 1994년 시복식을 거쳐 10년 만에 시성의 영광을 안았다.
그는 넷째 아이를 임신하고 두 달이 지났을 때, 자궁에 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하지 않고 임신을 유지하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의견을 물리치고 ‘태중의 아기를 구해달라’고 청했다. 7개월 동안 출산을 기다린 끝에, 부활 주간 토요일 아침 자신의 이름을 딴 ‘잔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 그 후 일주일 동안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39세의 나이였다. 그의 시성은 현대 교회 안에서 한 가정의 어머니였던 여성이 성녀로 인정된 첫 사례로 알려진다.
자신의 삶을 내려놓는 선택이 결국 네 명의 아이를 엄마 없이 남겨두는 것을 의미한다는 면에서 반대의 의견도 나올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가 확신했던 것은 ‘태중의 아기도 사랑받고 존중받을 대상이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가 지난주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전지방법원의 낙태 의사들에 대한 선고 유예와 형 면제 판결을 규탄한다!’는 제목이다. 3년 여 동안 405명의 태아를 낙태한 혐의로 기소된 의사 4명에 대한 항소심에서 검사의 항소를 기각하고 선고 유예와 형의 면제를 판결한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와 함께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는 내용이었다. 판결에 대해서는 본지에서도 이미 보도를 한 상황이었지만 주교회의 명의의 성명서 발표는 보다 사안의 심각성을 환기시켜 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지난해 헌번재판소는 임신 6주의 태아를 낙태하고 기소된 조산사의 낙태죄 위헌 소원에 대해 합헌 판결을 내린바 있다. 그렇게 볼 때 ‘사실상 낙태가 용인되는 사회적 분위기상 피고인들에게 무거운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이번 판시는 무언가 앞뒤가 안 맞는 경우다.
특히 1953년부터 형법 제27장에 ‘낙태의 죄’ 관한 법이 계속 적용돼 오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분위기가 용인되면 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 오히려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실소를 부르는 상황들이 ‘낙태 왕국’이라 불리며 전국 산부인과에서 매일 자행되는 불법 낙태 건수가 1000여 건에 이르는, 작금의 한국사회를 빚어내는 배경이라는 생각이다.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의 성명서 지적대로 이 판결은 낙태를 더욱 용인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낙태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입장을 천명한 셈이다. 죽음을 넘어 생명을 선택한 성녀 잔나 베레타 몰라의 이야기가 떠올려진 것은 그 때문이다. 가롤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은 성녀 잔나 베레타 몰라에 대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혼란스런 이 시대에 희망의 징표가 된다’고 했다. 생전에 그녀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말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산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사회의 반생명적 죽음의 문화 안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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