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녀’ 논란과 주체성에 대한 사유의 부재
한겨레신문사가 지난 5월 창간 25주년 기획으로 ‘2013년 대한민국 진주녀’를 다뤄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한겨레는 ‘기존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꿈을 좇아 자신을 삶을 개척하는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20대 여성’을 ‘진주녀’로 명명하고, ‘발랄하고 대안적인 삶을 개척하는’ 20대 여성 4명을 인터뷰한 기사와 더불어 전국의 20대 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하여 여성이 남성보다 더 진보적이고, 사회참여에도 더 적극적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2013년 5월 13일자)
이 기획기사들이 나온 후 거센 반감과 비판이 쏟아졌다. 진주녀라는 명명이 기존의 여성차별적이고 비하적인 조어들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여성을 대상화 혹은 타자화’한다는 비판에서부터 ‘규범적 젊은 여성상을 내세운 훈계성 켐페인’에 불과한 것이라거나 ‘오늘의 변화된 삶의 현실과 문제 속에서 새로운 주체들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결과’라는 비판, 그리고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이 처한 강퍅하고 경쟁적 현실을 외면하고 인간의 품성문제로 환원시킨 것이라는 비판 등 다양하다. 분명 공감할만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인간과 삶의 주체성에 대한 본격적이고 생산적인 논의의 장으로 옮겨가지 못하고 일시적인 논란으로 그치고 만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한겨레의 기획이 적어도 삶의 주체성 문제를 제한적으로나마 건드려놓았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나르시스적인 자기 세계로 유폐시키는 힐링의 상품이 넘쳐나는 우리 사회에서 정작 주체적인 삶에 대한 성찰은 그나마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서구와는 달리 주체적 인간과 삶에 대한 사유의 역사가 깊지 않고 그에 대한 성찰의 토양이 척박하다는 데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형편에서 한겨레의 기획이 세상의 통념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삶을 찾아 나선 몇몇 20대 여성들의 삶을 통해 우리 사회에 주체적인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오로지 개인의 역량강화와 성취만이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논리를 삶의 주문처럼 되뇌고,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한 우리 사회에 진정한 주체성은 폐쇄되고 단자화한 개인의 세계를 넘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형성될 수 있다는 암시를 순전히 얄팍하게만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주체성
주체적인 사람됨과 삶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세상사를 살아가는 데 무익한 잉여의 앎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사적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한 한줌의 권력, 곡학아세에 능한 지식의 세계, 빵의 욕망을 장악하여 인간의 영혼마저 식민지로 삼은 자본이 춤추는 세상일수록 더욱 요긴한 물음이다. 또한 그 누구도 이 물음을 벗어나서 참으로 사람으로 설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주체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인간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닌 어떤 특정한 세계의 이해지평이나 민족·인종·성별·학력의 차이, 그리고 혈연·종교·지역·문화·정치·경제의 이해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 현실세계의 그 어떤 통념에도 속박되거나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분이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오로지 인간을 살리시는 것이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며, 억눌린 이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호명하는 것이었다.(루카 4,18-19 참조) 이는 동시에 예수는 그들과의 만남 속에서(서로 받아들임으로서) 자신 역시 비로소 사람이 되고, 주체성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참으로 주체적인 인간이 되었고, 해방하는 만남 속에서 예수와 낯선 타인이 ‘진정한 우리’를 이루었다. 이는 세상의 통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우리’의 의미를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주체성은 하느님과 타인과의 관계를 떠나서 생각하기 어렵다. 특히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주체성은 곤경에 처하고 고통 속에 있는 낯선 사람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권력을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한 도구로 삼지 않음은 물론 타인을 해방하는 것으로 수행하며, 공정과 정의로서 타인과 관계를 이룬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의 주체성은 참말이 없는 세상에서 참다운 말과 생각을 일상의 동반자로 여기는데서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김정용 신부는 1993년 사제로 서품됐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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