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일단 내가 ‘정상’이라는 것부터 밝혀둔다. 물론, 잊어버리기, 헷갈리기, 우기기, 잡아떼기 등 정상수치를 다소 넘는 것이 있긴 하나 아무튼 내가 정상인건 내가 보증한다.
3년 9개월 전, 선물처럼 하늘 맑은 초가을 이른 오후, 나는 골목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골목 안은 햇살로 환하고 구석구석 깨끗했다. 골목담 작은 화단에는 채송화 과꽃, 붓꽃이 아롱다롱하고 키 큰 옥잠화가 하얀 입을 열고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타탁 튀는 가벼운 발소리였다. 골목길 정취에 느긋하던 나는 비켜서며 길을 내 주었는데 발소리 임자와 얼핏 눈이 마주쳤다. 그는 검은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해맑은 하얀 얼굴에 고수머리를 하고 넥타이 없이 흰 와이셔츠를 위까지 단정하게 채운 중키의 미소년이었다. 지나치면서 그는 나를 향해 살짝 웃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준비해” 단아한 입매에 치아가 가지런했다. 누구더라, 어디서 봤는데, 분명히 만난 적이 있는데.
다음 순간 알았다. 그냥 알았다. 골목길의 미소년, 그는 죽음이었다. 좀 멍했지만 무섭진 않았다. ‘준비’ 어차피 할 일이다. 토를 달 것도 없었다. 구석에 쌓아 둔 일기장에 눈이 갔다. 죽을 생각을 하니 살았던 게 켕겼다.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우주 어디로 떠난 시간들. 그러나 아직 남은, 과음 다음날 아침의 메스꺼움 같은 저 얼굴들, 오금 박히고 겁에 질려 퍼렇게 얼어버린 밉고 못생긴 나. 버둥거리며 울고 있는 서러운 나. 다 나와. 괜찮아. 뚝! 괜찮대도. 코 풀어, 얼굴 씻고. 이제 가. 저기 보이는 저 환한 우주로. 잘 가. 이윽고 빈자리 여기. 걸러져 좀은 말개진 내 영혼이 결혼식을 앞둔 신부처럼은 아니더라도 낯선 먼 곳을 혼자 여행하는 ‘달콤쌉싸름’ 센티멘털쯤으로 골목길 미소년과 재회할 수 있지 않을지.
아, 근데, 그땐, 숱 많은 은발을 뒤로 묶은 울림 좋은 목소리의 중후한 사내가 나와 주면 좋겠다. 이왕이면 갈색부츠와 진 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손에 내가 좋아하는 옥잠화를 들었음 더 좋겠다. 그리고 두툼한 손을 내밀어 내 어깨를 감싸주면 정말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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