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 걸린 가시처럼, 눈의 티끌처럼, 마치 화두처럼, 내 마음 속인지 머리 속인지 깊이 가라 앉아 있는 단어가 있다. 깊숙이 잠겨 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올라 나를 괴롭히고는, 한바탕 내 마음과 머리를 뒤흔들어 놓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종잡을 수 없는 단어. 가난!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단어가 내 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는지. 신학교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신부가 돼서, 그것도 아니면 빈민사목을 시작하면서부터….
아무튼 본격적으로(?) 가난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복학하기 전 천주교도시빈민회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가난 공동체 생명’을 주된 가치로 삼고 있는, 오래 전부터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익히 알고 있는 무서운(?) 조직.
가난!
다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데 왜 하필 가난이지? 가난이 뭐가 좋다고? 그리고 꼭 그렇게 일부러 가난하게 살아야 하나? 가난한 동네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당시의 나에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 충격 때문이었을까, 세월이 흘러 빈민사목위원회 선교본당을 맡게 되면서 빈민사목을 시작하게 됐다.
빈민사목위원회의 정신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선택(1979, 푸에블라 문헌)’을 비롯하여 ‘복음적인 가난’, ‘가난의 영성’, ‘자발적 가난의 삶’ 등등…. 가난이란 단어는 이제 마음속이나 머릿속에서 생각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 가난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왜 그랬지? 그리곤 다시 떠오르는 예수님의 말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 그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말씀, 도대체 예수님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거지?
추억 하나 : 어린 시절
어릴 적 참 많이도 이사를 다녔다. 그렇게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니다 말 그대로 대궐 같은 집을 만난다. 이모네 집이었는데 어떤 사정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살게 됐다. 잔디가 깔린 정원에 연못까지 있는 이층집이었다. 방도 5개인가 그랬다. 다섯 식구인 우리는 당연히 방 하나씩을 차지했다. 처음엔 마당에서 공차고 야구하고 내 방에서 눈치 안 보고, 역시 넒은 집이 좋긴 좋구나!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상했다. 마치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기분이 드는 것이다. 같은 공간 안에 있어도 만날 수가 없다. 하루 종일 혼자인 듯한 느낌. 누구라도 집을 나가거나 들어올 때 인사하고 나면 그뿐, 그 다음부턴 내 방에 나 혼자다. 이거 가족이 같이 사는 것 맞나? 더 크고 넓은 집에 살면 더 좋아야 되는 것 아냐?
추억 둘 : 군종신부 시절
신부되면서 운전은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군종을 가게 됐다. 부랴부랴 면허증을 따서 군종을 갔다. 당연히 차가 있었다. 미사하러 차로 20분 이상씩 가야 했으니까. 차를 끌고 다니다보니 가까운 거리도 차로 가게 되었다. 편하니까. 그러다 차가 고장났다. 할 수 없이 며칠을 걸어서, 때로는 버스로 볼 일을 보러 다녔다. 그런데 의외로 좋았다.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걸어가다, 또는 버스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재밌고 즐거웠다. 그 때 든 생각! 이거 차 없애야 되는 거 아냐?
예수님은 모든 권세와 영광을 거부하셨다(루카 4,5 이하 참조).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가난하게”(2코린 8,9) 사셨다. 예수님은 왜 가난하게 사셨을까? 혹 재물과 물질은 행복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되는 장애물은 아닐까, 혹 가난할 때 더 사람 사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닐까?
흔히들 가난하면 먼저 부족함과 불편함을 떠올린다. 그런데 꼭 휴가철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크고작은 여행을 떠난다. 집 떠나면 무슨 고생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집을 떠난다. 자연과 사람 안에서 쉼을 갖기 위해서다. 그런데 집을 떠난다는 걸 생각해보면 부족함과 불편함을 선택하는 것이고 이는 곧 가난을 찾아가는 것 아닌가?
행복지수 1위 국가는 늘 저소득 국가라는 사실, 지구촌의 굶주리는 사람들은 지구상의 먹을 것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넘치도록 갖고 있는 사람들이 나누지 않아서라는 사실, 이래저래 우리는 좀 더 가난한 삶, 좀 더 단출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묵상하게 된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 20).
1991년 사제품을 받은 임용환 신부는 서울 서초동본당 보좌와 군종을 거쳐 1999년 빈민사목에 뛰어들었으며, 2011년부터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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