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 전공수업 시간이었다. 강의 중 교수님께서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이름을 꺼내셨다. 전공과는 관련이 없는 내용이었는데, 어떤 주제 때문에 그 이야기가 나온 것인지 또렷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엔도 슈사쿠’라는 인물과 함께 그의 소설 ‘침묵’ 에 관한 내용이 나눠졌다. 그리고 교수님은 소설 속 한 구절을 소개하셨다. 지금도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떠올릴 때 마다 기억되는 글귀다. “밟아도 좋다. 밟아도 좋다.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 한다. 나를 밟는 네 발은 얼마나 아프겠느냐.” 문구만으로도 나약한 인간을 감싸 안으시는 예수님 음성을 듣는 듯 인상적이었다.
그 시간 이후 ‘침묵’ 에 빠졌다. 17세기 일본의 박해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 하느님을 외면해야만 삶을 부지할 수 있는 고민하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치밀하고도 생동감 있었다.
소설의 내용을 접하는 동안 나 역시 ‘하느님은 고통의 순간에 어디에 계시는가?’를, ‘배교 아니면 죽음이 요구되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과연 예수님을 선택할 수 있는 강한 신앙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을 것인지’ 되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고문과 죽음이 무서워 예수님 얼굴이 그려진 성화에 발을 올려놓으며 배교를 하고, 또 사제를 팔아넘기기도 했던 기치지로가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며 고해를 하는 장면에서는 나를 비롯한 연약한 갈대 같은 인간들의 모습이 비춰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순교’의 의미를 보다 깊게 생각해본 계기였던 것 같다.
빠르면 내년 중 하느님의 종 124위에 대한 교황청의 시복 결정이 내려질 것이 예상되면서 한국교회의 순교자 시복시성 기원 열기가 더욱 뜨거워지고 있는 듯 하다. 특히 ‘신앙의 해’에 순교자성월을 맞으며 순교 신심의 참된 의미를 살피고 고양시키는 다채로운 행사들이 교구별로 준비되고 있다.
박해시대처럼 피흘림이 없는 현 시대 상황 안에서 강조되어지는 것이 ‘백색순교’다. 실제 죽음을 당해 피를 흘리는 ‘적색(피) 순교’라 한다면 ‘백색(白色)순교’는 피흘림 없이 하느님 사랑을 위해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이교도 집안 출신으로 로마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는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모습에 감동, 그리스도교 신자가 됐다는 교부이자 평신도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155? ~230?)는 “너희들이 우리를 타작(살해)할 때 마다 즉시 우리는 더 많은 숫자로 불어난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호교론 50,13)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신앙선조들의 순교 영성을 바탕으로 한 한국교회야 말로 그 ‘씨앗’ 이 되었던 순교자들 덕분에 오늘의 교회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백색순교’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 결실인 우리들이 해야 할 바는 신앙 선조들의 생애에 담긴 ‘신앙의 용기’와 ‘하느님께 대한 헌신’, ‘이웃에 대한 사랑’ 등 피 흘리는 믿음 속에서 지켜냈던 신앙의 보화들을 오늘의 삶에서 되살려내는 것이지 싶다.
박해때 처럼 피 흘리는 순교는 없다 하더라도 ‘백색 순교’의 삶속에서 물질주의, 세속주의, 상대주의, 개인주의의 세파에 맞서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복음적 삶에 충실하며 빛과 소금의 사명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그러한 무혈의 순교적 삶이 되지 않을까.
그때 뿌려진 씨앗들은 장차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 안에 새로운 신앙의 씨앗이 되고 또 새로운 열매로 맺어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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