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쯤 읽었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대답없는 질문」은 지금까지도 내게 깊은 여운이 남아있는 책이다. 음악이론에 전혀 문외한인 필자가 끙끙대면서도 책의 마지막 장을 즐겁게 넘길 수 있었던 까닭은 음악을 둘러싼 역사와 문학, 그리고 정신사적 맥락을 두루 꿰뚫어보는 해박하고 흥미진진한 해석 덕분이기도 했지만, 실은 그의 소통하는 힘 때문이었다. 그때 진정한 대가 내지는 전문가란 끊임없이 자신을 비판적 물음 앞에 세우며, 문외한에게조차 진중하게 말을 건네고 넉넉하게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날 전문가들의 세계에서 진리의 관점과 보편적인 소통력을 찾아보기란 바닷가의 모래알을 세는 것보다 더 어려워진 것 같다. 지식탐구의 영역이 광범위해진 탓도 있겠지만 앎의 체계가 극도로 분화하여 파편화, 상대화, 전문화되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여 개별적이고 전문적인 앎이 확대되고 심화되었을지는 모르나 숲 전체를 조망하거나 어떤 사태를 통합적으로 꿰뚫어보는 안목은 한층 퇴화되었다. 이런 현실이 낳을 수 있는 가장 큰 위험과 부작용은 어쩌면 전문가의 존재 그 자체일수 있다. 전문가들이 지식세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부당한 권력과 어울리면 진리추구는커녕 최소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소통조차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전문성은 얄팍한 자기과시로 표출되거나 절대적 맹신을 강요하는 수단이 되고, 사유화된 권력에 머리를 굽히기 일쑤이다.
오늘날의 전문가
MB정부 시절 4대강 사업을 맹렬하게 지지했던 어느 재미교수는 올해 초, 그와 다른 학문적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의 인격을 터무니없이 비하하다 명예훼손에 걸려 넘어져 법원으로부터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게다가 4대강 사업에 비판하는 이들을 싸잡아 ‘반정부좌파’라고 윽박지르는 굴절된 전문성에는 아예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의 입장이야 어떻든 비판적 물음을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으로 제압하려는 우리사회의 전형적인 비이성을 한 뼘도 넘어서지 못한 것이었다. 2010년에 발생했던 천안함 사건 역시 우리사회의 합리적 이성과 소통력을 의문시하게 했던 사건의 하나로 기억될 법하다. 정보를 독점한 정부가 사건의 원인을 설득력 있게 해명하려고 하기보다는 합리적 물음조차 불온시하고 정부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함으로써 되레 의혹을 증폭시켰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그에 대한 의견을 표명할법한 전문가들이 도통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그 분야 전문과학자들이 없어서 그런 것이었을까. 혹여 연구비 확보에 영혼이 묶여 진실에 눈감은 것이었다면 그 침묵은 꽤나 값비싼 것이었으리라.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군부의 전문성도 하등 다를 바 없다. 군사전문가로 자처하는 장수들은 넘쳐나지만 정작 전시작전통제권조차 자주적으로 운영할 수 없을 정도이니 군사주권을 책임진 장수로서의 기개와 명예를 운운하는 것도 민망할 뿐이다. 친일역사와 군사독재를 미화하고 분단체제의 꿀맛에 길들여져 있는 지식인들의 세계는 여전히 정신적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급기야 염치마저 잃어버렸다.
예수님 시대의 전문가
잠시 역사의 시간을 되돌려 예수시대에 최고전문가였던 율법학자들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되새겨보자. 예나 지금이나 굴절된 전문가들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 당시 종교적, 사회적 위치의 정점에 올라있었던 율법학자들은 하느님과 율법해석의 최고전문가였으나 자기과시와 사사로운 탐욕의 늪에 깊이 빠져있었다. 현란한 궤변에 능숙하였고 자유와 해방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죄인’이라는 대못을 박는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인간의 자유를 꽁꽁 묶어놓고 심지어 하느님마저 폐쇄적인 해석체계에 가둬놓았다.(특히 마태 23장 참조) 그들이 예수로부터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마태 23,33)이라는 혹독한 꾸짖음을 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율법학자들은 하느님과 율법의 전문가였음에도 정작 하느님의 음성과 해방과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해석체계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런 세상의 풍파도 느끼지 못하는 온실의 사유세계에 가둬 둔 것처럼.
사회가 전문적인 역량을 쌓은 이들에게 전문가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까닭은 순전히 자기만족에만 충실하라고 하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떠한 부당한 권력과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며, 무지와 편견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의 폐해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더 나은 인간과 세계를 위한 공적 책임을 수행하라는 보증일 것이다. 그럴 때 전문성은 존중할만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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