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상복구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원상복구 하도록 하겠습니다.’
길을 걷다가 본 어느 공사 구역에 써 놓은 팻말의 글귀다. 참 친절도 하지. 한국도 많이 달라졌네.
그러나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말, ‘원상복구!’ 모든 것을 원래 모습대로 돌려놓는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부서지고 파괴된 물건이나 벽돌 등은 다른 것으로 바꾸면 되지만 거기서 살다가 사라져간 생명들은 어떻게 원상복구가 되지?
생명은 한 번 사라지면 결코 복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모른다. 아니, 알고는 있지만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나하고는 깊이 연결되어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치부해버린다. 그러나 그곳이 어떤 곳이든 그곳에는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다! 개발이나 복구 이전에 그곳에는 이미 그곳이 삶의 터전인 생명들이 있다. 그리고 사실 그들이 그곳의 주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무시한다.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잘 보존하라는 말씀이지 없애라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 인간에겐 생명을 없앨 권리가 없다. 오직 잘 지킬 의무만 있을 뿐이다. 생명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요한 1, 4 참조)
“평화를 이루려면 피조물을 보호하십시오.” 피조물에 대한 존중은 커다란 중요성을 지닙니다. “창조는 하느님의 모든 업적의 시작이며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 보호는 이제 인류의 평화 공존에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제43차 평화의 날 담화문, 2010년 1월 1일)
생명의 소중함
우리는 생명의 소중함, 그 가치를 너무 모르고 있다. 사람의 생명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 물질문명의 가장 큰 악이다. 돈으로는 결코 생명을 되돌릴 수 없다.
지금 그런 생명들이 사라지고 있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인간의 욕망과 욕심으로 한 번 사라진 그들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4대강 사업, 제주 해군기지 공사, 핵발전소 건설로 사라진 숱한 생명들, 우리는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 사라진 국민 혈세가 아니라 사라진 그들을 위해 우리는 울어야 하고 분노해야 한다.
나비와 벌들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인간도 살아갈 수 없다. 회색빛 삭막한 빌딩 숲 도시, 왜 사람들은 거기에 풀과 꽃들을 심고 나무들을 옮겨다 심겠는가? 작은 생명들이 살 수 있는 곳이라야 우리 인간도 인간답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다.
작은 생명들도 이런데 하물며 인간의 생명은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미 자살이 사망 원인에서 앞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나라. 죽음의 문화! 수많은 학생들이 죽어가고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 농민들이 죽어가도 교육정책은 바뀌지 않고 사회, 경제 구조는 그대로이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생명들이 아파하고 신음하며 죽어가고 사라져가야 하는 걸까? 눈물이 난다.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난다.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돈, 물질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악한 것인가! 두려워해야 한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 24) 그래서 예수님도 단호하게 끊으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 10) 그러나 우리는 지금 돈, 물질을 섬기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언젠가 읽고 너무 마음에 다가와 적어둔 글.
“마지막 나무 한 그루가 죽고, 마지막 남은 강까지 독으로 오염되고, 마지막 한 마리 물고기까지 다 잡히고서야 우리는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어떤 아메리칸 원주민)
사라져가는 생명들을 위해 지금 당장 우리들은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새로운 삶의 양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핵심은 단출한 삶이다. 조금 더 불편하고 부족하게 사는 것이다.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의식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단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단출한 삶이란 덜 사는 것이며 덜 버리고 덜 쓰는 삶이다. 더 소유함으로써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더 놓음으로써 만족하는 삶이다. 더 포기함을 기뻐하는 삶이다.
이 가을, 9월 순교자 성월에 오늘의 순교정신은 ‘놓는 것, 버리는 것,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묵상해 본다. 낙엽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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