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링턴은 1980년대 초 「온 마을이 필요합니다」라는 책을 썼다. 한 아이를 기르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영향을 미친다는 외침이다. 우리 교우촌은 인간생활이 사회와 더불어 형성됨을 보이는 전형이었다. 그리고 함께하는 사회의 저력을 드러냈다.
첨례표와 수도원 시간표
초기교회 천주교 신자들은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들은 첨례표를 벽에 붙여 놓고 일상을 오로지 교회의 전례주기에 맞추어 생활했다. 아침저녁이면 조과와 만과를 바치는 기도소리가 집집마다 들렸고, 만과는 마을공동으로 바치기도 했다. 주일에는 회장의 지도 아래 함께 파공을 지키며 주일 공소를 보고, 각종 기도문을 바쳤다. 이들이 매일 기도 드리는 시간은 오늘날 수도공동체와 별다름이 없었다. 교우촌의 신자들은 이러한 생활을 자발적으로 해나갔다.
교우촌의 아이들은 일상생활과 신앙활동에 큰 구별이 없이 성장했다. 쌍호공소 출신 어느 수녀는 “사랑하는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을 당하여 사흘만에 살아나셨네”라는 성가를 부르며 뛰놀았던 고무줄 놀이를 기억한다. 놀이는 비신자 어린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쌍호마을의 어린이들은 신자와 비신자를 불문하고 뱀을 죽이면 마귀를 죽이는 것이라고 하여, 뱀만 보면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쫓아다녔다고 한다. 신자들과 어울린 외교인 아이들도 가톨릭은 몰라도 신자인 또래 아이들의 행동을 따라하며 성장했다. 계산성당 근처에 살던 한 어린이도 자라서 수녀가 되었는데, 신자가 되어서야 어려서 부르던 놀이용 노래들이 성가였음을 알고 새삼스러워했다.
교우촌 신자들은 물질과 정신에서 소통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오늘 남은 찌개를 이웃과 나누면, 내일에는 그것이 감자가 되어서 돌아옴을 알았다. 지식이나 재주가 좀더 많은 사람은 이웃을 위해 이를 제공할 줄 알았다. 그들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익히고 더불어 실천했다. 이 교우촌 생활의 힘은 엄청났다. 교우촌과 공소들은 이웃에게 신앙을 퍼주는 무진장한 창고였다.
지금도 교우마을을 유지하고 있는 경북 상주시 물미공소는 지난 60여 년간 사제 14명, 수도자 16명을 배출했다. 경북 의성군 쌍호공소에서는 주교 1명, 사제 15명, 수녀 11명이 나왔다. 교회의 수장인 교구장들도 이런 곳에서 태어났다. 현임 교구장 중에서 대구대교구의 조환길 대주교는 강림공소, 안동교구의 권혁주 주교는 쌍호공소, 수원교구의 이용훈 주교는 느지지 공소의 열매들이다. 은퇴하신 주교들 가운데에도 교우촌 출신인 분들이 적지 않았다.
공소마을이나 교우촌은 사회적 잣대로 보았을 때 뛰어난 힘을 지닌 곳은 아니었다. 대개는 외딴 곳에 있는 작은 시골에 불과했다. 쌍호공소는 신유박해 때부터 신자들이 모였지만, 1890년이 되어서야 공소가 차려졌다. 대구시 달서구의 강림공소는 1928년 계산성당 앞을 지나던 강림 주민이 영세를 받고나서 전교가 된 마을이다. 수원 화성군의 느지지 공소는 장주기 성인의 탄생지였는데, 병인박해가 지난 후에는 달성서씨들이 이 교우촌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마을 주민 전체가 교우였던 교우촌은 외교인들 다수가 들어와 함께 사는 공소촌으로 바뀌어 갔다. 공소 예절은 성당의 미사로 바뀌어 갔다. 지난날의 공소 신자들은 이제는 본당의 신자들이 되었다. 신앙의 은행인 공소는 이렇게 사라져가고 있다.
성직 수도자들의 못자리
교우촌 출신인 한 어른을 모시고 유적을 답사할 때였다. 유적지 입구에서 할머니들이 사과를 팔고 있었다. 현지 물건을 사는 재미도 있고 사과도 한입 베어 물고 싶었다. 한 무더기에 만 원이었다. 한 할머니께 날은 덥고 들고 다니기도 힘드니, 5천 원에 반 만 달라고 흥정을 했다. 어찌어찌하여 사정이 통했다. 할머니가 사과를 네 개째 봉투에 넣으려하자, 아직 멀었는데도 그 어른은 그만 담으라고 했다.
나는 너무 많으면 들고 다니기가 힘드니 반만 달라고 흥정했지만, 그래도 돈대로는 다 받을 생각이었다. 내심 한 개쯤 더 얻을까 궁리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순간 나는 당황했다. 좌판을 벌인 할머니들도 낯설어했다. 그러나 나의 당황함, 그 할머니들의 낯설음 속으로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어른의 한마디 말에서 오는 신선한 충격이 교우촌을 사회로 실어나르고 있었다. 교우촌은 그렇게 부활을 꿈꾸는지 모른다.
우리는 살면서 조그만 이익에 망설일 때가 있다. 사소한 일을 참기 어려운 순간도 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는 ‘작은 배려’는 우리 사회를 덥혀준다. 그 따뜻함은 가톨릭 정신을 사회에 떨구는 씨앗으로 변할 수 있다. 내일의 가톨릭신자, 성직자와 수도자, 주교를 기르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작은 정의 실천이 사회 전체를 교우촌으로 되살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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