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와 노쇠한 언어의 권력
시대가 음습하니 말 또한 어지럽고 사나워졌다. 사나운 말들이 폭주하고 횡행하는 시대에 시인조차 독초로 무성한 언어를 경계하지 않으니 참으로 고약한 일이다. 한때 김지하의 붓끝에서 나오는 언어는 세상의 모든 난폭한 권력을 쩍 갈라놓을 정도로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의 세월 역시 굽이굽이 흘렀다. 시인의 언어는 그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노쇠해졌고, 언젠가부터 권력이 되어 있었다. 노쇠한 권력이 된 그의 굽은 언어에도 풍자와 해학은 여전했다. 그것이 음습한 권력이 아니라 국민을 향해 있다는 것 말고는. 그의 풍자와 해학이 국민을 ‘종북세력’으로 일갈하는 것으로 마침내 미학적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가 저항했던 권력마저 그의 언어에 고분고분해졌다.
맹목과 적대의 권력이 낳은 말: ‘종북’
언젠가부터 ‘종북’이라는 말이 우리의 언어를 구속하고 정신세계를 통치하는 못된 권력의 선동언어 내지는 전위적인 언어가 되었다. 누구보다도 자유로울법한 시인의 언어와 정신세계마저 현혹시킬 정도이니 그 위세는 가히 떵떵거릴만하다. 대체 무엇이 이런 괴팍한 언어를 낳게 했을까. 남북한의 분단현실? 엄연한 현실이긴 하나 분단체제로 인해 고통을 당했던(당하고 있는) 이들은 언제나 남북한의 힘없는 사람들이었으니 그 해석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듯하다. 이른바 도처에 존재하는 종북주의자들 때문? 허나 대한민국을 위험에 빠뜨렸던 이들은 그들이라기보다도 음지에서 공포와 공안정치를 꾀했던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역사적, 민주적 정통성이 희박했던 지배세력이 생존과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간계를 부려 ‘빨갱이’에서부터 ‘종북주의’에 이르기까지 적대세력을 끊임없이 (재)창조하지 않았던가.
종북이라는 말이 이토록 횡행한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적대성과 배타성에 깊이 뿌리내린 우리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우리의 언어와 정신세계가 근본적으로 ‘왜’라는 물음을 상실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왜라는 물음을 잃어버린 사회에서는 종북과 같은 적대와 배제의 언어가 호황을 누린다. 그러나 실상 종북타령은 현실권력이 스스로 민주적 정통성과 자유로운 소통의 힘을 잃어버렸다는 데서 생겨난 두려움과 초조함을 거칠게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일상 언어와 정신세계가 피폐해지고 정치도, 언론도, 역사도, 학문도 모두 한결같이 구차해졌다는 반증일 따름이다.
맹목과 맹신이 낳은 인간의 수난사
한 사회가 더 이상 왜라고 묻지 않거나 왜라고 묻는 자유를 배척할 때 종북과 같은 맹목과 맹신의 말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난다. 맹목과 맹신의 본질은 타자의 삶을 무자비하게 파괴한다는 데 있다. 인간의 수난의 역사는 언제나 터무니없는 맹신과 맹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예수의 수난사가 바로 그렇다. 당대의 종교권력자들과 정치권력자들 그리고 그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했던 군중들은 예수를 처형시킬만한 털끝만한 잘못도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이 애초부터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배척하고자 결단했던 것이 무고한 인간 예수를 십자가라는 극형에 처하지 않았던가. 예수의 수난사에서부터 20세기 유다인 수난사, 그리고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수난사에 이르기까지 무고한 인간의 수난사는 오로지 적대성을 근거로 한 맹목과 맹신이 빚어낸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령 현실권력이 종북이라는 수사로 맹목적이고 무차별적인 권력의 창끝을 감출 수는 있어도 왜라는 말로 표출되는 인간의 비판적인 사유와 자유를 결코 제압할 수는 없다. 왜라는 말은 인간이 창조한 가장 자유로운 말이요, 그런 만큼 인간의 그 어떤 주의·주장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모든 형태의 편견·오해·차별·배제의 언어에도 속박되지 않으며, 그 누구도 그 어떤 권력도 꺾을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자유를 표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라고 묻는 인간의 자유는 모든 뒤틀린 언어를 의문시함으로서 정신세계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힘이 있다는 데 그 위력이 있다. 그러나 왜라는 성찰적 물음이 사라거나 배제된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도 정치도, 역사도 학문도, 종교도 온전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수난 역사를 종식시킬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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