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숨쉬는 ‘땅’
오늘도 열심히 돌아다녔다. 버스로, 지하철로, 도보로, 여기저기 밟고 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다녀도 일부러 아니면 밞기 힘든 것이 있다. 흙이다. 보도블록으로, 아스팔트로, 콘크리트로, 도시란 다른 말로 흙, 즉 땅을 덮어버린 곳이 아닐까?
생명이 자라날 수 없는 어둠의 죽어버린 땅! 그것이 너무 삭막해서일까. 곳곳에 흙을 붓고 나무와 꽃을 심어 놓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곳이 생명의 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로 위의, 건물 위의, 지하도 위의 흙더미는 거대한 화분일 뿐 생명의 땅이 아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자라는 나무와 꽃들은 식물인간처럼 살아있지만 진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목숨만 겨우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마치 동물원의 짐승들처럼.
그런 도시에서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곳에서 진짜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람들이 점점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간다. 한 회사, 기업의 부품처럼 되어 간다. 더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는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틈을 안주고 정신없이 바쁘게 만든다. 비판적인 정보는 차단한다. 그리고는 적당한 음식과 쾌락과 편안함을 제공한다. 마치 동물원의 짐승들처럼. 그리곤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그 울타리를 제거하거나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내쳐버린다.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도록 철저히 소외시켜버린다. 이런 사회 속에서 길거리에 나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 이런 사회 속에서 의로움이란 무엇일까?
의로운 사람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다.(마태 1,19 이하 참조) 자신의 명예나 위신보다는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모습이다. 의로운 요셉은 결국 마리아를 받아들인다. 거부하지 않고, 내치지 않고, 품어 안는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마리아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마리아는 더 이상 그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의로움은 ‘사람으로서 지키고 행하여야 할 바른 도리’이란 이런 것이다.
예수님의 의로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난하고 병든 이,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거나 내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치유시켜주심으로써 그들도 한 인간으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도록 하셨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는 말씀 그대로이다. 예수님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마태 20,1-16 참조). 그 주인은 품삯을 일꾼의 노동 시간이나 일의 능력에 따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기본 조건으로 품삯을 지불한다. 주인의 이익이 우선인 것이 아니라 일꾼의 삶이 품삯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의로움이란 이런 것이다.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으로서 대접하는 것, 인간을 기준으로 삼는 것.
공동선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 사회교리는 공동선이라는 기본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공동선의 원리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 일치, 평등에 근거한다.”(사회교리 164항) “창조된 재화의 분배는 공동선과 사회 정의의 요청에 합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실한 관찰자는 누구나 지나친 부를 소유한 소수와 궁핍하게 사는 다수 사이의 큰 차이가 현대 사회에서 심각한 해악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교황 비오 11세 「사십주년」 28항)
갈수록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상위 20%를 위한 사회에서 이제는 상위 1%만을 위한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똑같은 자동차의 오른쪽 바퀴를 조립하는 사람과 왼쪽 바퀴를 조립하는 사람이 있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임금은 차이가 난다. 한 명은 정규직이고 다른 한 명은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다. 단지 기업의 이익을 위해 대규모로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사회, 단지 시험 점수로 학생들을 평가하는 사회, 단지 외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몸이 좀 불편하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사회, 한마디로 의로움이 상실된 사회다.
“공동선이 지닌 무수한 함축적 의미 가운데에서도 재화의 보편적 목적은 직접적인 의미를 갖는다.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사회교리 171항) 한 사람의 기본적인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재화는 나누어져야 한다. 이것이 의로움이다. 한 사람을 한 인간으로 소중하게 대하고 존중하는 것,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쓸모없다고 불편하고 귀찮다고 외면하거나 내치지 않는 것, 오히려 품어 끌어안는 것이다.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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